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스토너라는 인물이 실패한 인생처럼 측은하고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그의 삶에서 인간의 존엄과 우리가 삶에 기대해야 하는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승진한 적이 없고, 학생들도 그를 또렷이 기억하는 이가 드물며, 동료들 또한 높이 평가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책의 서문은 스토너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너무나 평범하고 보통의 삶을 살아간 스토너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유베날리스는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원래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을 풍자한 시로, 신체 단련에 집착하는 경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토너』 속에서도 정신과 육체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인물, 이디스가 등장한다.
이디스는 상류층 자녀로 태어나 예술, 문학, 예절을 배웠지만, 그것들은 교양이 아닌 억압의 수단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몸과 마음은 별개이며, 때론 서로 적대적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왜곡된 가치관은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미쳤고, 결국 스토너와의 관계는 육체적·정신적 단절을 겪게 된다. 그저 책임감으로 유지되는 결혼은, 마치 전쟁터에 의무감으로 나간 친구 매스터스의 죽음처럼 비극적이다.
그녀의 양육 방식은 딸 그레이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레이스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임신은 억압에서 탈출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디스는 육체를 억누른 채 영혼의 지배를 당하며 살아온 불행한 인물이다. 반대로, 욕망만을 부추기는 삶 역시 영혼이 부족한 삶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정신과 육체가 균형을 이룬 인물은 캐서린 드리스콜이다. 그녀는 스토너와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을 절제하고, 고통스러운 이별을 감내함으로써 관계를 지켜내려 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파괴가 아닌 책임이었다.
스토너(William Stoner)의 이름도 그의 삶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Will(의지) + Helm(투구) =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
Stone(돌) + -er(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 단단함, 강직함, 감정 억제, 삶의 무게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연을 순응하며 살아온 이였다. 농부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주어진 자연 속에서 땅을 일구고 결실을 맺는다. 스토너도 삶의 시련을 묵묵히 견디며 인생을 일구어간 사람이다. 그의 인내는 농부의 아들과 문학이라는 기반 위에서 스토너라는 이름처럼 더욱 단단해진다.
그는 아처 슬론 교수의 권유로 영문학을 전공했고, 교수가 되었다. 문학은 삶의 이야기를 서술하며, 존재의 깊이를 성찰하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스토너는 젊어 보이는 친구 고든 핀치보다 더 늙어 보인다. 아무래도 젊은이보다 노인이 삶의 고뇌를 더 많이 품기 때문 아닐까? 스토너의 주름은 그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성찰의 깊이를 말해주는 표식이다.
스토너가 매료된 학문은 문학과 수사학이었다.
아처 슬론 교수의 '셰익스피어 강의'에서 그는 비극의 힘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삶은 희극보다 비극에 더 닮아 있다. 비극은 고통을 응시하게 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며, 카타르시스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반면, 희극은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스토너는 비극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존재가 된다.
수사학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학문으로, 설득을 위한 기술이자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살다 보면 수사학은 단순한 웅변술이 아니라, 관계 맺기와 존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임을 실감하게 된다.
수사학의 세 요소는 다음과 같다.
로고스 (Logos) : 논리적 구성과 주장
파토스 (Pathos) : 감정적 호소, 청중의 공감
에토스 (Ethos) : 화자의 신뢰와 인격
캐서린과 스토너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할 수 있는 청중이자 화자가 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신뢰에서 비롯된 관계였다. 그것이 스토너가 마지막까지 그녀를 그리워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한다.
사랑을 기대하고, 성공을 기대하고, 우정을 기대한다.
스토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제안으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아처 슬론의 권유로 영문학을 전공했고, 친구 매스터스, 고든 핀치와 우정을 나누며, 이디스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살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삶은 그의 기대를 빗나갔다.
존경하던 아처 슬론은 연구실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고, 우상 같던 친구 매스터스는 전장에서 주검이 되었다. 이디스와의 결혼은 사랑이 아닌 억압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멈추기도 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하고 좌절하지만, 스토너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는 암이라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안에서 존엄함을 발견했다. 책 속 문장으로 다시 한번 그의 존엄한 삶을 들여다보자.
p.387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어 했다. 그는 사랑을 원했고, 실제로 사랑했다. 그러나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무심한 교사였음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순수성과 성실함을 꿈꿨지만, 타협하는 법을 배웠고, 일상의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p.390
“넌 무얼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듯했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 것 없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존엄이란 스스로를 낮추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삶을 엄숙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성공이나 명예가 없어도, 자기 내면의 품위와 무게를 간직한 상태, 그것이 바로 존엄이다.
스토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든 핀치처럼 외적인 성공을 거두지도, 사회적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낮추지 않고, 주어진 삶을 끝까지 감내했다.
우리는 존엄하게 살고 있는가?
혹시 타인의 인정을 위해, 어떤 ‘가치’라는 이름 아래 맹목적으로 살고 있진 않은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남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낸다면, 그것은 곧 존엄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존엄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인간의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