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이 첫 문장으로 유명한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다. 이 터널은 단순한 통과 지점이 아닌, 삶과 죽음,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임을 깨닫게 한다. 국경은 두 세계를 가르고, 터널은 그 경계를 넘어서는 통로다. 시마무라가 설국을 찾는 이유는, 어쩌면 그 경계 너머에서 잠시 몸을 숨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가끔 시마무라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간 아름다운 눈의 고장에 사는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의 삶에도 각자의 긴 터널이 있었다.
삼나무의 꽃말은 “그대를 위해 살다”이다.
삼나무의 꽃말을 닮은 두 여인의 이야기.
고마코는 게이샤로 일한다.
처음 게이샤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유키오'를 잊지 못하고, 그의 병 치료를 위해 돈을 번다. 약혼한 사이라지만 그 관계에 사랑은 없는듯하다. 일기를 쓰는 고마코는 게이샤 일을 하며 소설을 열권이나 썼다고 시마무라에게 말한다. 하지만 의미있는 결말을 맺지 못한 자신의 사랑이야기처럼 그것마저 헛수고같이 느껴진다. 시마무라에게 “사랑받았다는 게 무엇인가요?”라는 그녀의 질문은, 무의미한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였을까?
요코는 간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녀의 애인 유키오는 병약했다. 요코는 그를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유키오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모든 애씀은 공든 탑이 되고 만다. 유키오의 죽음이후 그녀는 간호사의 꿈을 되찾기 위해 시마무라에게 도쿄로 데려가 식모로 써달라 부탁하지만, 화재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설국의 두 여인, '요코'와 '고마코'의 삶은 허무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꿈을 버린 채 한 남자를 위해 헌신한 요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바친 고마코. 그러나 작가는 허무한것 같은 두여인의 삶 속에서 눈의 고장답게 하얀 눈처럼 순수한 마음과 은하수 같은 아름다움을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 삶에도 긴 터널이 있다.
고단한 일상, 불안한 내일, 지치게 하는 관계들… 누구나 한 번쯤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얀 설국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눈은 어두운 현실과 아픔을 잠시 덮어준다. 차가움은 오히려 감각을 무디게 하여 고통을 잊게 한다. 설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순수함이 우리를 부를 때가 있다.
하지만 눈은 찰나에 불과하다. 눈이 내리는 동안은 삶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지만, 봄이 오면 얼어붙은 눈은 녹고,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인생이다.
반복되는 일상,
이룰 수 없었던 꿈,
누군가를 위해 바친 헌신이 허탈하게 느껴져도, 지나고 나면 그것이 곧 삶이고, 때로는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지금 우리는 저마다의 긴 터널 속을 걷고 있다. 때로는 벗어나고 싶고, 때로는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경계 위에 선다. 시마무라는 터널을 지나 설국에 닿았지만, 결국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 역시 여행이나 휴식으로 잠시 눈 덮인 이상향에 발을 들이지만, 삶은 다시 우리를 일상으로 불러낸다.
우리 앞에 놓인 긴 터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어둠이 길었기에 빛이 더 선명해지고, 경계가 있었기에 건너간 세계가 특별해진다. 설국은 잠시였지만, 그 순간의 순수함이 시마무라를,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러니 지금 긴 터널 한가운데 서 있는 당신,
이 시간을 헛수고라 여기지 않기를.
언젠가 이 어둠을 지나 눈부신 설국에 닿을 때,
그 길 위에서 버틴 당신이야말로 은하수처럼 빛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