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은중과 상연>을 보고
“엄마~!”
손가락에 난 상처를 보여주며 울먹이는 아이.
작은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인 양, 손가락을 들어 “호~해줘”라며 보챈다.
같은 상처를 입은 다른 아이는 “괜찮아”라며 반창고 하나 붙이고,
묵묵히 하던 일을 다시 이어간다.
상처에 대한 반응 속에서 우리는 아이 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아이를 볼 수 있다. 또
어떤 어른은 자신의 결핍을 타인을 통해 채우려 하고,
어떤 어른은 상처를 통해 자신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을 배운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 은
서로 다른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두 친구가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품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은중은 아버지의 부재를 글로 다독이며 스스로를 치유할 줄 아는 아이였다.
반면 상연은 풍족한 집안에서도 사랑의 결핍 속에 외로움이 깊었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서 다시 만나지만,
상연은 또다시 상처를 사랑으로 메우려다 관계를 잃고 만다.
은중은 아픔을 일로 승화시키지만,
상연은 결핍을 타인에게 기대는 방식으로 반복한다.
결국 두 사람은, 상처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가, 아니면 타인에게서 메우려 하는가’의 차이였다.
라캉은 말했다.
“자신의 결핍은 타인에게서 회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타자와 나의 언어는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은 결코 나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때 나는 남편에게 의지하며 나의 결핍을 보상받고자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말들은 허공에 흩어졌다.
그 대신 나는 일상 속에서 치유를 배웠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내 시간을 채워갈 때 상처는 서서히 사라졌다.
우리는 종종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찾는다.
그러나 일방적인 사랑은 상연처럼 상대에게 부담이 된다.
사랑은 가벼워야 한다.
‘가볍다’는 말은 진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각자의 사랑이 자신으로부터 출발할 때,
그 사랑은 자유롭고 건강하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부담도,
상대의 상처를 대신 치유해줘야 한다는 책임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에 가벼워진다는 게 솔직히 쉽지는 않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처는 더 깊을 수밖에 없다.
감정은 이성과 별개가 되어, 상처는 여전히 자신을 흔든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와 대면할 때만이
타인에게 의존하던 나의 시간을 스스로 돌볼 수 있게 된다. 아파도 힘들어도 어쩔 수 없다.
대면이 가능하다면 이젠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독서모임을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읽고, 사유하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최고의 환경이 된다. 모임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책을 읽기 어렵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마주하기 두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은중과 상연〉을 보면
결국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모든 욕망을 내려놓게 된다
그토록 애태웠던 자신의 상처가 덧없이 나아있는 것을 죽음 목전에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안다면, 막다른 골목길에서 갈팡질팡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은 훨씬 단단하고 안정되지 않을까?.
지금 나는 나의 상처를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진출처ㅡ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