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만나는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
편의점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오가는 특별한 공간이다.
남녀노소, 경제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
낮에는 사람들의 본성이 잘 안 나오는 듯하다.
주위 사람의 시선과 주어진 역할에 맞추어져
그들만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낮에 그들과 나의 관계는 사회적이고 좀 더 예의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밤이 되고,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좀 더 그들의 본능에 충실해지고, 우리의 관계는 왠지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1
중고등학생들은 밤이 되면 교복을 벗고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회에서 규제하는
담배와 술이 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살 곳을 찾아다니고,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집에서 술을 마시려고
여러 편의점을 돌며 구매를 시도한다.
그들에게 남자 어른이 일하는 편의점은 조금은 어렵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쉬운 상대를 찾는다
덩치 크고 무서운 인상의 남자 어른은 피한다.
약해 보이고 작은 남자나, 젊은 여자 알바생이 그들의 표적이다.
그들이 들어오면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가끔 내가 여자 알바생과 있을 때
그들은 여자 알바생에게 담배를 요구하고
그녀는 신분증을 요구한다.
내가 있어서일까, 그들은 물러나지만 표정이 좋지 않다.
담배 한번 줄 수 있지, 뭐 이렇게 까다롭게 구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서 편의점의 밤은 젊은 여성이 혼자 일하기에는 좀 위험하다.
행여나 남자 알바생이 있어도,
여고생들의 경우 단체로 와서 부탁을 한다.
그들은 인상을 쓰지 않는다.
젊은 남자일 경우 환심을 사려한다.
단체로 웃으면서 와서 이것저것 묻는다.
"잘생긴 오빠 여친 있어요? ㅎㅎ 우리 담배 한 개만 주시면 안 돼요.
저희가 음료수 사드릴게요."
그들은 애교를 부리면서 이렇게 부탁한다.
하지만 한번 주기 시작하면,
이 편의점은 그들에게 담배구매처로 변경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호한 거절이 필요하다.
2
내가 일하는 주상 복합에는 여러 가게가 있었다.
치킨집, 카페, 여러 종류의 식당.
그리고 술집까지.
밤에 혼자 있다 보면, 술을 사러 오시는 손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리고 술을 많이 드신 손님들도 많이 오신다.
일단 술을 드신 손님이 들어오면, 긴장이 된다.
술을 마신, 그들의 본성이 나오고,
그들의 눈에 편의점 알바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쉽게 반말이 나오고, 쉽게 요구한다.
당시, 봉투가 막 유료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봉투값에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낮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분들이
봉투에 돈을 낸다고 어이없어하시고 그냥 들고 가기도 하고
마지못해 사는 분들이 많았지만,
밤에 오는 손님들, 특히 술에 취한 분들에게 봉투값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봉투값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나에게 반말로 "이걸 그냥 들고 가라고?" 하던가,
"담에 줄게 일단 그냥 줘"라고 하던가,
봉투 값을 받는 게 말이 되냐며 무작정 화를 내는 분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회사에 윗사람에게 무시당했던가,
거래처에서 무시당하고, 여기저기 깨졌던 그들에게
나는 그들의 좋은 분풀이 먹잇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드신, 특히나 술 먹고 혼자 오신 손님이 오면
편의점 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물론 술을 마시고 안 좋은 본성이 나온 사람들과 달리 더 따뜻해 지는 사람이 있다.
가족들에게 빈손으로 가기 싫어서인지,
술을 마시면 평소 자녀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사가는 분들이 있다
친구들과의 한잔 후 기분이 좋아진 어르신들은
서로 아이스크림 값을 내겠다며 투닥거리기도 한다.
때대로, 2차인지 3차로 친구 집에 초대받은 어른들은,
상대 집에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신다.
그러면 다음날 그 집의 사모님이 오셔서
이거 여기서 사간 거죠? 좀 교환 가능할까요?'
하며, 실제 실사용이 가능한 제품으로 바꿔 가시곤 한다
3
밤에 산책같이 혼자 오시는 할아버님이 계셨다.
그는 매일 오지는 않았지만, 일주일에 3~4번은 오셨다.
매번 그가 구매하는 제품은 팩소주.
병이 아닌, 작은 사이즈의 팩소주를 한 개 사시고는
매번 나에게 빨대 한 개를 부탁하셨다.
안주 한 개 없이, 팩소주에 빨대를 꽂아서
밖에 나가면서 조금씩 드시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너무 귀여워 보였다.
아마 집에서 못 먹게 해서 산책을 나와서 그렇게 드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 할아버님의 몇 안 되는 취미이자 낙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끔 오다리 같은 안주거리를 같이 사시기도 하면,
내가 웃으면서 오늘은 안주도 같이 드시네요 하면
그 할아버지는 씩 웃고 나가시곤 하였다
나중에 그 할아버님께 플라스틱 통에 나온
작은 사이즈의 소주를 보여드렸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다.
아무래도 팩소주는 계속 들고 가셔야 하고, 닫을 수 없어 불편하셨나 보다.
4
밤이라고 안 좋은 손님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밤에 일을 하시는 치킨집 사장님은 종종 햇반을 사러 오셨다.
어머니 또래의 중년 여성분이셨는데,
늦은 시간밥을 먹고 싶은데, 조금만 하느니 햇반이 생각보다 괜찮았다며
배고플 때 한 번씩 사러 오시곤 하셨다.
손님이 없으면 손님이 없다고 뭐 새로 나온 것 없냐며 오셔서
과자를 사가시기도 했다.
가끔 친구들이랑 그 치킨집에 가면, 편의점 총각이 왔다며 서비스로 이것저것 챙겨주시곤 하셨다.
5
밤에 오는 손님 중 자주 오는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지하에 있는 술집에서 일하는 웨이터로 예상되는 총각으로 보이는데
가끔 손님들의 담배 심부름을 오던가
술집에서 일하는 드레스 같은 옷을 입은 여성분들과 음료나 담배를 사서 자주 왔었다.
이제 성인이 된 나의 눈에 그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왔을 때 나의 말투는 무언가 좀 심드렁했다.
자주 보면 밝게 인사할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감정 없이 물건만 팔고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런 나를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의 12시가 된 밤에 노란 머리 외국인이 편의점에 들어왔다.
이미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의 눈치를 보고, 편의점을 쓱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딱히 필요해 보이지 않는 주스를 한 게 사더니, 나에게 영어로 길을 물어보았다.
그의 천천한 영어 질문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미련하게 한국말로 그에게 설명하였고,
그는 전혀 못 알아듣는 표정으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이때 지하 술집의 30대 남자가 들어왔다.
외국인은 그 술집 남자에게 길을 다시 물어봤는데
놀랍게도 그 남자는 유창하진 않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나에게 그가 물어본 목적지에 어떻게 가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술집 남자에게 길을 소개해주고
그 술집 남자가 그 외국인에게 길을 이해해 주며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그 외국인은 술집 남자에게 고맙다며 무슨 일 하냐고 물어봤다.
그 술집 남자는 본인은 프리랜서라고 둘러대고는,
나에게 담배를 사서는 다시 사라졌다.
겉모습으로만 판단했는데,
이 사람은 영어 한마디 못하는 나보다 훨씬 낫구나.
자괴감에 빠지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다음에 그 총각이 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좀 더 공손하게 상냥하게 대하게 되었다.
6
새벽에도 손님이 자주 온다.
12시가 지나서 1, 2시 새벽,
술이 떨어져서 술을 더 사러 오는 분들이 많지만,
어느 날은 술을 안 먹은 듯한 손님이 오셨다.
그는 이것저것 자잘한 것을 사고는 마지막에 콘돔을 샀다.
당시 순수했던 나에게 이건 무언가 굉장히 좀 부끄러웠다.
아마 다른 자잘한 것보다 이 콘돔이 그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닐까 싶었다.
그가 콘돔을 건네주고, 내가 계산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혼자서 그가 처했을 상황의 시나리오를 여러 가지 그려본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콘돔이 없어 급하게 사러 온 그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런 그를 기다리는 여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렇게 물건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나는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엄지 척을 날려주었다.
밤의 편의점은, 좀 더 사람의 본능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정말 당장 필요한 물건들, 당장 그들의 본능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이 많이 팔리고,
그래서일까, 이걸 사러 온 사람들은 좀 더 본능적이다.
본능적으로 표현하고, 낮에 가면을 쓴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어떨 때는 쉽게 관계가 형성되고, 대화가 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고 상대가 먼저 상하관계를 형성하여 나를 상대할 때도 있었다.
편의점은 작은 가게이지만,
또 다른 하나의 작은 사회로써,
너무 많은 종류의 관계가 있고,
여러 종류의 관계가 계속해서 형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