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다... 자클린 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
오늘은 요절한 젊은 천재 첼리스트, 영국의 장미 자클린 뒤 프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어쩌면 이름마저도 아름다운 그녀는 20세기 첼리스트 중 빼놓을 수 없는 세계적인 연주자입니다. 175센티의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적인 그녀의 연주는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켰고, 여성연주자를 이야기할 때면 항상 첫 손에 꼽히던 천재였지요. 그런 그녀를 세계인들은 ‘영국의 장미’라 불렀답니다.
'뒤 프레'라는 이름이 프랑스어처럼 들린다는 분들이 많지만 영국인이에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은 그녀는 다섯 살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에 관심을 보이며 첼로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범인과는 다른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혜성처럼 나타난 최고의 첼리스트'로 성장합니다. 거장 파블로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자클린. 그녀의 재능을 높이 산 당시 40대의 로스트로포비치는 10대의 재클린을 일컬어 '나보다 훨씬 더 큰 업적을 이루어 낼 음악가'라고 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녀는 스승 로스트로포비치보다 훨씬 빨리, 20년이나 빠른 죽음을 맞게 됩니다.
1965년, 그녀 나이 20세,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자클린은 대스타가 됩니다. 말 그대로, 정말 대스타가 되었어요. 당시 영국에서는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회가 열리고 나면 첼로를 배우는 젊은이들이 급증할 정도로 그녀는 신드롬적인 존재였습니다. 영국의 황태자도 그녀의 연주를 매우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만큼 그녀는 재능이 넘쳤고, 아름다웠습니다. 자클린의 연주는 항상 힘이 넘치고 강렬했지요.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을 뛰어넘는 에너지, 현을 거칠게 긁는 파워풀한 그녀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감과 정열을 선사했습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 지금은 수없이 많은 첼리스트들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이 곡은 당시에만 해도 연주자들이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던 곡이었어요. 재클린은 이 곡을 단숨에 첼로의 명곡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자클린 뒤 프레의 트레이드 마크로 남아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PhkZW_jwc0
20세의 자클린이 사랑에 빠진 상대는.. 지금에야 너무도 유명한 그 이름,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1942~현재. 아르헨티나 태생 유대인으로 명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7세에 베토벤으로 독주회를 열 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음악가)입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음악가로서 재능이 넘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야망이 넘치는 남자였어요.
다니엘과 자클린이 사랑에 빠졌을 때, 자클린의 부모님은 둘의 사이를 크게 반대했다고 해요. 영국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 안에서도 천재로 대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란 둘째 딸 자클린과 달리 아르헨티나 태생의 유대인이자 4개의 국적을 가진 바렌보임의 복잡한 출신도 아마 걸림돌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다니엘의 야망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옛말에 어른들 말씀 틀린 게 없다고 하던가요, 자클린의 큰 체격과는 달리 남자치고는 작은 체구의 다니엘, 그가 가진 재능, 그리고 눈빛과 행동에서 뿜어내는 커다란 에너지와 야망이 자클린의 부모님의 선견을 자극하는 어떤 부분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러나 젊은 음악가의 뜨거운 사랑은 어른들의 반대를 뛰어넘습니다. 1966년에 만난 둘은 1967년, 1년 만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합니다. 자클린은 사랑하는 연인 다니엘을 위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대교로 개종을 하고 당시 아랍 국가들과 전쟁 중이었던 이스라엘 땅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부모도, 종교도, 전쟁도 갈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둘의 사랑이 너무나도 뜨거웠던 이때, 자클린의 나이 스물 하나, 다니엘 스물넷이었습니다.
두 천재의 만남과 사랑과 결혼은 당시로서도 정말 대단한 이슈였습니다. 비로소 하나가 된 이 세기의 커플은 전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둘의 연주는 음악계의 찬사를 받으며 성공의 성공을 거듭합니다. 사랑과 명성, 두 가지 토끼를 거머쥐고 영원할 것만 같던 행복 위로 비극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결혼 후 채 4년이 지나지 않았던 1971년 경, 자클린은 몸의 감각에 이상을 느끼게 됩니다.
쉽게 피곤을 느끼고, 연습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강렬하고 정확하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연주는 어딘가 예전 같은 정교함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연주 중 음을 놓치고 템포를 놓치고, 결국은 무대에서 활을 떨어뜨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 자클린을 열정적인 다니엘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클린이 고통을 호소하면 그건 네 연약한 정신력의 문제라며 불같이 화를 내고 그녀를 몰아붙입니다.
자클린은 유난히 가까웠던 친언니, 힐러리와의 통화에서 그녀의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다니엘의 성공을 향한 끝없는 야망과 음악적 열정이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지요. 후일 친언니 힐러리의 고백에 따르면, 둘의 싸움이 있었던 어느 날, 다니엘은 자클린에게 그런 연약한 정신력으로는 정신병원에 가는 쪽이 낫겠다며 다그쳤다고 합니다. 그런 다툼 속에서 자클린은 본인의 문제가 몸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정신력의 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울한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1973년,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이 되던 해, 그녀는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이라는 통지를 받습니다.
다발성 경화증. 중추신경계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원인 불명의 이 희귀 질환은, 온몸의 감각이 둔해지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전신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는 병입니다. 2023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불치에 가까운 난병이지요. 전신의 예민한 감각을 최대로 발휘해서 무대에 서는 연주자라는 직업으로는 사실상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자신의 병을 알았을 때, 자클린은 오히려 일말의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연주자로서 그녀의 재능이 급격히 쇠퇴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병이 있다는 것을 확인받은 사실에 안도했다는 그녀의 말. 이것은 그녀가 그간 얼마나 정신적으로 분투해 왔을지, 그녀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연주를 그만둔 뒤의 그녀의 삶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스물여덟, 연주자로서 전도 유망한 나이에 은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자클린 뒤 프레. 그런데 누구보다 그녀의 곁을 함께 해야 할 단 한 사람, 그녀의 남편 다니엘은 그녀 곁에 없었습니다. 갓 서른 하나의 다니엘은 너무나도 에너지가 넘치고, 너무나도 재능이 있었고, 그리고 아직 너무나도 젊었어요. 병마에 찌들어 더 이상 재능마저 잃어버린 부인 곁을 조용히 지킬 수 있는, 그런 멜로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음악과 대중과 그리고 꿈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지휘자로서 여전히 바쁜 연주 일정을 소화하며 주옥같은 리코딩도 많이 남깁니다.
오랜 병 앞에는 효자도 절절한 사랑도 없는 법인가 봅니다. 다니엘은 자클린과의 삶을 철저히 분리합니다. 그리고 이내 그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옵니다. 상대는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 (지금도 이 둘은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1980년대 초반에 교제를 시작한 이 두 사람은 자클린이 병상에 있던 시간 동안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곧 아이도 생기죠. 반면 자클린의 병은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진행됩니다.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어 결국에는 눈도 뜨지 못하게 된다는 희귀 난치병. 말도 할 수 없고 끝내 울지도 못하는 끔찍한 병 앞에서, 자클린 그녀는 굳어버린 눈꺼풀을 기구로 들어 올리며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요. 음악가로서 그토록 사랑했던 연주를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더해, 음악의 동반자이자 인생의 동반자로서 사랑을 맹세했던 남편 다니엘이 음악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며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을 불구의 몸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일이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삶을 견디죠?"라는 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서는 깜깜한 갱도 안의 막장과도 같은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이 느껴집니다.
가엾은 자클린은 무려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홀로 외로움과 절망감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가 1987년,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다니엘과 함께 연주했던 레코딩을 듣는 것만이 병상위의 기나긴 세월 동안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고 해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언니 힐러리의 연락으로 다니엘이 달려왔고, 사랑했던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클린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자클린 사후 1996년, 언니 힐러리와 동생 피어스는 자클린 뒤 프레의 삶에 대한 회고록 <A Genius in the Family >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 원고는 훗날 <Hilary and Jackie>라는 영화로 각색되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또 독일의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는 오펜바흐가 작곡한 미발표 첼로 곡을 발견하여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비통한 선율은 영광과 좌절, 사랑과 배신과 고통이 농축된 그녀의 불꽃같은 짧은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Wk097ESo0k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던가요.(웃음) 주목을 받았던 세기의 커플이었던 만큼, 다니엘 바렌보임은 한 때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비난과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병든 아내 자클린을 버린 나쁜 노무 새끼'가 되었지요.
그러나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젊은 시절 그의 야망만큼이나 커다란 꿈을 이룬 거장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80세가 된 그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왕성한 음악 활동을 보이며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바그너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로서, 클래식 음악계에 굳건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외도 상대였으나 자클린 사후에 아내가 된 엘레나 바쉬키로바와의 결혼생활도 굳건히 유지하고 있지요. 세월이 많이 지나 슬하에는 장성한 두 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다니엘 바렌보임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세상은 자클린 뒤프레를 먼저 떠올립니다. 어쩌면 엘레나는 자클린의 그림자에 가려진 또 다른 희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 건 저의 삶과 사랑을 보는 방식도 넉넉해진 이유일까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모습이 있을 테니까요.
비록 자클린은 불꽃처럼 찬란하고도 짧은 생을 살다 떠났지만 두 예술가의 사랑은 그들 음악의 원천의 힘이 되어주었고, 시대의 예술가가 남긴 음악들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언니 힐러리가 남긴 회고록 속에는 무서운(!) 말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자클린이 언니에게 몰래 남긴 말,
“힐러리, 왠지 난 어른이 되면 전신마비에 걸릴 것만 같아. 그냥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이거 비밀, 엄마한테 말하지 마."
(오싹 소오름)
범인과는 달리 예민한 감각을 가진 천재가 예견한 자신의 앞날이었을까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