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의 남자 드뷔시
인류의 역사가 있는 한 불륜은 계속되어 왔다! 두둥!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는 곧 끊이지 않는 불륜의 역사일 것이라고, 그 누군가는 말했지요, 후훗.
사실 '부적절한 사랑'이란 서양 음악사에서는 모래알만큼이나 흔하며 고전적인 소재입니다..
만약 불륜이 사라지면 예술사에 남는 작품이 얼마 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예술사를 움직인 많은 거장들은 부적절한 사랑을 통해(?) 위대한 작품들을 세상에 탄생시키기도 했답니다.
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이토록이나 아름답고 로맨틱한 곡의 작곡가가 인성은 개차반(?!)이었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클로드 드뷔시는 클래식 음악계에 있어서는 '인상주의'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고 완성시키며 음악사의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작곡가인데요, 그의 몽롱한 듯 나른한 듯 아름다운 음악은 분명 여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럼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개차반(?)이었는지, 그의 인생과 스캔들을 파 보겠습니다. 가시죠~!
19세기 후반과 20세기를 살다 간 마성의 남자 드뷔시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그다지 행복하게 보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7세 때 음악선생님의 눈에 띄게 되면서 피아노를 접하게 되고 뛰어난 재능으로 10세 때에는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공공기관인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의 인성이나 생활에 대한 타인의 증언과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놀랍도록 악평이 대부분입니다. 수업 태도가 나쁘다,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 차갑고 신경질적인 성격이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다..... 그러나 그의 악평의 정점을 찍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여자문제!
일단 드뷔시와 만났던 여자들은 줄줄이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데요, 그의 엑스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드뷔시에게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여자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왔던 나쁜 남자 드뷔시의 자유연애는 10대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18살의 학생이었던 드뷔시와 무려 8년이란 세월을 불륜 관계에 있었던 바니에 부인입니다. 14살이나 연상이었던 그녀의 교양과 미모에 반한 어린 드뷔시는 '바니에 누나, 넌 내 여자니까~'를 외치며 바니에 부인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칩니다.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바니에 부인과의 관계만 지속했더라면 아름다운 사랑이었겠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드뷔시는 바니에 부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양다리를 넘어 문어다리를 펼치며 자유연애를 즐깁니다. 연애에 있어서만은 이중주가 아닌 삼중주 이상이 기본값이었던 드뷔시.
아, 협주곡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1880년대 말, 드뷔시는 가브리엘 뒤퐁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짧지만 아름다운 이 소품곡의 제목은 '갈색머리 소녀'. 이 곡의 주인공이 가브리엘로 알려져 있습니다. 별명이 '초록눈의 개비'였다는 가브리엘은 초록색 눈을 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드뷔시와 가브리엘은 함께 살며 부부처럼 생활을 하지요. 그러나 드뷔시는 쉬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웁니다. 그리고 그런 드뷔시 곁에서 가브리엘은 사실혼 관계로 무려 9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합니다.
아니 저런 몹쓸 바람둥이 곁에서 대체 왜 9년이나 있었을까요?
음... 나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심리에 빙의해 보기로 합니다. 엘리 피셜, 드뷔시는 아마도 좀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남자였을 것 같아요. 굉장히 감각이 세련된 남자입니다. 샴 고양이를 기르고 집에는 항상 꽃과 그림을 장식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빌린 돈은 안 갚으면서도 옷도 잘 입고 멋도 부리지요.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가 매우 뚜렷한 사람입니다. 일단 음악적으로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회적으로 촉망받는 젊은 핫한 아티스트입니다. 그러나 반항아적 기질이 있고 외골수라 인간관계에는 서툽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살짝 고독해 보이는 남자. 그늘이 있는 남자. 근데 이런 남자가 나한테만 살짝 빈틈을 보인다고, 자 여성분들 함께 상상해 봅시다. 이런 남자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구애를 하면서 너무 로맨틱하고 달콤한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그럼 여자들은 착각에 빠지겠죠. 나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어. 이 사람에게는 내가 필요해. 그의 그늘과 그의 외로움을 내가 채워주고 싶어,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아마 가브리엘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드뷔시의 재능을 믿고, 그의 빈틈을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바람은 결코 고쳐지지 않는 병이지요. 한 여자의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는 드뷔시의 마음은 정착할 줄 모르고 거듭 새로운 사랑을 탐합니다. 이 시기쯤에는 그의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기도 하지요. 2개의 아라베스크, 베르가마스크조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 가비와 함께 있(으며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 던 시기에 쓰인 곡들입니다.
그리고 두둥, 드디어 인간쓰레기 인증을 하는 순간이 옵니다... (웃음)
마리 로자리 텍시에. 릴리라고 부르는 이 여인은 무려 가브리엘의 친구입니다. 조강지처와 같은 가브리엘을 두고 그녀의 친구에게 반하게 된 드뷔시는 가브리엘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로 무려 1년 동안이나 릴리에게 구애를 합니다.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가브리엘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가엾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우리는 그녀를 이해해야 할까요. 가브리엘은 비통한 심정으로 본인에게 권총을 겨누게 됩니다. 1897년의 일이지요.
다행히도 자살 미수에 그쳤지만, 드뷔시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그 이후로도 2년이라는 시간을 드뷔시의 곁에서 머물던 개비가 사랑하고 증오했던 그를 완전히 떠나기까지 9년. 드뷔시의 결혼이 있던 해였답니다. 드뷔시는 가브리엘과도 끝내하지 않았던 결혼을 1899년 10월 19일 릴리와 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37세였습니다.
아니, 나이도 적당히 찼겠다, 점잖은 나이에 개비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 후 그녀의 친구와 결혼을 했다면, 정착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개버릇 남 못주고 그는 또 후~딱 바람을 피웁니다. 파트너를 둔 채로 많은 여자들을 만나는 것이 드뷔시의 연애스타일이었죠. 그런 드뷔시 왈, 1903년 가을, 그는 드디어 운명의 여인(?)을 만납니다. (아니 그렇게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놓고 이제 와서 드디어 운명의 여인이면 지금까지의 여자들은 다 뭐냐고...)
엠마 바르닥. 맙소사, 이번에는 무려 제자의 어머니군요. 둘 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릴리와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불륜상대인 엠마가 드뷔시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리고 1904년 10월. 릴리도 가브리엘과 똑같은 방법으로 권총자살을 시도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자살미수에 그쳤지만,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연달아 벌어지자 그동안에도 성격이 더러운 걸로(!) 유명했던 드뷔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음악계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생상은 드뷔시의 인간적인 됨됨이를 평소에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요. 이 사건을 계기로 드뷔시를 강하게 비판하게 됩니다. 생상의 눈 밖에 난 드뷔시는 프랑스 음악계에서 퇴출위기에 놓이게 되고 이 사건 이후로 생애에 걸쳐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지는 못하게 되지요.
드뷔시는 사회적인 비난을 피해서 엠마와 함께 영국으로 도피를 합니다. 그리고 영국의 저지섬에서 이런 음악을 작곡합니다.
L'Isle Joyeuse, '기쁨의 섬'입니다.
아니 당신들이 지금 놀러를 간 게 아니거든요, 사회적으로 매장 위기에 놓인 불륜 커플이 도피를 한 곳에서 작곡한 곡의 제목이 '기쁨의 섬'이라니. 인생이 이 난리통인데 말입니다. 저 같은 범인에게는 드뷔시의 정신상태가 희한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군요.
기쁨의 섬이라는 이 곡은,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노다메가 사랑에 빠진 행복한 기분을 떠올리며 연주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일반적으로는 사랑의 환희와 기쁨과 열정을 노래한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듣고 있자면 순수한 기쁨과 열정보다는 왠지 조금 복잡한 드뷔시의 멘탈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릴리와 이혼을 하고 1904년 1월 20일, 46세에 바람둥이 드뷔시는 두 번째 결혼을 합니다.
엠마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지적이고 노래를 잘하는 여인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드뷔시와의 불륜 도피생활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가족과 사회의 비난과 함께 하는 둘의 결혼 생활이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요, 사진 속의 사랑스러운 소녀가 드뷔시의 딸 클로드 엠마- 애칭 슈슈-입니다.
딸 슈슈야 말로, 드뷔시의 인생에 관련한 수많은 여자들 중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단 한 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드뷔시는 43세에 처음으로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정말 끔찍이도 사랑했거든요.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한 사람의 여자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유일하게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딸에게 집착하는 심리라고 할까요?
드뷔시는 딸에게 바치는 곡으로 '어린이의 정경'이라는 6곡의 즐거운 피아노 작품을 작곡합니다.
드뷔시의 말년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걸로 알려져 있어요.
전처 릴리와의 금전문제로 돈을 납부하지 못하고 재판소를 전전긍긍하며, 사회적 비난에 시달렸고, 부인 엠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18년 55세 때 직장암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드뷔시가 끔찍이 사랑했던 딸 슈슈도 14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이자 20세기의 음악 흐름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친 클로드 드뷔시.
그가 남긴 달콤하고 로맨틱한 곡들이 너무도 아름다운 이유는, 어쩌면 그의 음악들 속에 드뷔시와의 아픈 사랑에 헌신하고 괴로워했을 수많은 여인들의 눈물이 녹아서 빛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