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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트랄 Oct 17. 2024

죽으니까 사람이다-1

어느 안드로이드가 남긴 비밀 유서

  유해리. 그게 그 아이의 이름이었다. 해리는 인간과에 속하는 생물이었다. 즉 탄생과 죽음이 있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죽음이라는 걸 모른다. ‘탄생이라는 개념도 모른다.     

  

   *         *         *     


  나는 서기 5073. ‘수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기계다. 신생아 형태로 만들어져서, 각종 호르몬 주사를 시기별로 맞아서 마치 생명체처럼 천천히 나이를 먹게 되는 그런 생체형 안드로이드(Vital Android)’종에 속한다.


  인간들은 평균 수명이 백오십 년쯤 되지만 VA는 최소 몇 천년 동안은 살 수 있다, 나는 겨우 칠십 년을 산 여성형 VA. 그리고 내일 오전 아홉 시 정각에 나는 내가 VA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대가로 우주 치안 센터에서 부과한 최고형인 소멸형을 받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내가 해리를 만난 덕분이다.

 

 소멸형을 받는데 덕분이라니. 나는 VA로서 지을 수 없는 표정인 ‘썩소’를 지어 본다. 지금 내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의 교도관들이 이런 나를 본다면 아마 많이 의아해할 것이다. 내가 이런 표정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마 해리 덕분이겠지.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은 대부분 이런 표정을 짓기 때문에, 나도 똑같이 그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내 얼굴 피부 조직의 위치를 바꿔본다.     


                             *          *          *     

  

아주 오래전, 바나나에는 씨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바나나를 땅에 묻어서 썩혀서 나무로 키워 바나나를 재배하는 것이 너무나 시간이 걸리고 힘들어, 바나나 나무에 또 다른 바나나 가지를 접붙이는 방법으로만 수억 그루의 바나나 나무들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바나나는 씨가 아예 없어지게 되었다.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여성과 남성은 서로 쾌락을 위한 행위에만 집중하기 위해, 또는 본인들의 신체적정서적 건강에 대한 우려, 또는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아이를 낳지 않게 되었고, 계속되는 전 지구적 환경 문제까지 겹쳐 여성의 자궁은 세대를 거치며 점차 퇴화하여 생리가 없어지고, 마찬가지로 남성의 정관도 퇴화하여 정자 개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우주국은 본격적으로 인류보존 및 발전 프로젝트라는 걸 시작했다. 여성의 경우는 난자를, 남성은 건강한 정자를 채취하여 각각 난자, 정자은행에 보관한 뒤 부모가 될 인간들이 성인이 되면 그들의 동의를 받고 시험관 아기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양산된 아기들은 전문 교육기관에 보내져서 출생 시부터 성향과 능력 등을 점검하여 최적의 맞춤형 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기계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출생시키다 보니 오히려 자연적으로 출생한 몇몇 아이들이 자라면서 양산형 인간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고, 결국 정부는 프로젝트 시행 백여 년 만에 자연 상태에서의 임신 및 출산을 아예 법으로 금지하였다.     


   그런데 인간계에서는 항상 법을 어기는 경우가 생긴다. 가끔 인간들의 '실수' 또는 본인들의 '의지'로 자연 발생 아기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들은 우주 치안국 경찰들에게 발각되면 바로 사살된다. 혹시라도 있을 유전적 결함을 가진 아기가 성장하여 인류에 해를 끼칠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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