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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트랄 Oct 24. 2024

레위인의 변론-6

사사진의 선택

#우주력 1042년 5월 24일


<사사>

정작 문제가 된 건,  그후 얼마 뒤 플랫이 나에게 보낸 스마트 칩 서신이었다.


  토요일 오전 6시였다. 괘종시계 알람이 깜박거리며 까치 소리를 . 눈을 뜬 뒤 평소 습관대로 침대에 누운 채로 손가락을 움직여 눈 앞 공간에 화면을 활성화시키고, 새로 도착한 이메일을 검색했다.


 '수성녀와 목성남 상간자 사건', '금성 출신 노동자 지구연방청 방화', '해왕성 기계인권강화주장 정치인 암살 피의자' 등 열 개가 넘는 사건 관련 재판 기록 판례가 적힌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중, 플랫이 보낸 파일이 눈 앞 화면에 제일 가까이 보였다. *중요! 비밀유지 * 항목이 붙은 <친애하는 사사에게> 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순간 손가락으로 튕겨내서 삭제해버릴까 고민했다.


  그러나 어쨌든 파일 제목에 시선을 맞추고 눈을 깜박이자, 짧은 동영상이 재생됐다.


   젊고 아름다운, 하얀 피부가 눈처럼 빛나는 여성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ᆢ 사사진이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아주 시원하고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름의 해변에 쏟아지는 샛노란 태양빛 같은, 강하게 나를 찌르는 일본도 같은 그 하얀 치아가 내가 아닌 그녀를ᆢ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미칠 것 같았다. 

    

그 아래, 짧은 메시지가 달려 있었다.


"사사. 난 너와의 내기에 실패했어. 하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야. 이 숏폼 동영상을 보면 대충 알겠지? ^^ 난 사사진을 꼬시지 못했지만,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그때 보여준 행성 역사 다이아목걸이 '플래닛 스토리즈'는 줄 수 없어. 계약은 쌍방 파기하도록 하지. 그리고 사사진과 함께 영원히 잘 지내길 바랄게. ;>" 


첨부된 스마일리 이모티콘과 함께... 플랫의 메시지는 이것이 다였다. 미친ᆢ나는 곧장 사사진을 불렀다.     


   

                     *           *          *    


#우주력 10425월 24


<사사진>


 사사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내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뺨부터 때렸다. 그리고는 당장 네 엄마가 있는 해왕성으로 꺼져버리라고 '명령' 했다.     


질문은, 안드로이드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사의 개인 우주선 중 하나인 '사사로운 삶'(그녀는 자기 우주선에 기묘한 이름을 붙였다)을 타고 지구에서 해왕성까지 날아갔다.     

  

27km가 넘는 그곳까지 도착하여 어머니 산드라 박사를 만나는 데는 약 3개월이 걸렸다. 기계지만, 오랜 여정에 '부품이 녹슬어' 있을 나를 위해 어머니는 안드로이드의 성능을 최적화시켜 주는 '레저랙션 돔'에 나를 눕히고 충분한 정비 기계들을 이용하여 휴식을 취하게 해 주었다.


잔잔한 Lo-Fi 재즈 뮤직과 적절한 온도와 습도 속에서 충분한 영양 상태와 체력을 유지시켜 주고 근육량을 조절해 주는 어머니께 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나는 사사가 올 때까지 동면에 들어갔다.


                      *           *            *     


# 우주력 1045년, 11월 12일. 명왕성, 우주법정


<사사>
"ᆢ배심원님들께 묻습니다. 안드로이드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 맞습니다. 그는 사람도, 그렇다고 단순한 '물건'으로 볼 수도 없죠. 그렇다면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생명체'로 보아야 할까요?


 '치라'의 변론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옛날 지구의 '백과사전'이라는 종이로 만든 물건에 안드로이드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안드로이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과 닮은 행동을 하는 로봇. 또는 그런 지적(知的) 생명체. 공상 과학 소설 따위에 등장하는 인조인간을 이른다.


물론,  옛날 존재했던 스마트폰 등의 운영체제도 '안드로이드'라고 했었습니다만... "     


  치라가 속삭이듯 읊조린 '운영체제'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좌중이 다 같이 폭소를 터트린다. 치라는 배심원들과 방청객들이 실컷 웃을 수 있도록 잠깐 시간을 준 뒤, 변론을 이어나갔다.     


" 때는 공상과학 소설 따위에나 등장했지만, 지금은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생명체이지요. 현재 코스모스 안드로이드 관리법 제53항에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의가 이렇게 내려져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과 닮은 행동을 하는 로봇. 또는 그런 지적(知的) 생명체. 즉 인간이 만든, 인간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간을 위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대체, '기계''생명체'의 개념이 한 존재 안에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걸까요?     


침묵. 이런 질문에는 대개 누구나 아무 말도 못 하게 마련이다.     


"뭐 좋습니다. 지금은 '우주사회와 윤리' 수업 시간 따위가 아니니까요."     


다시 한번 터지는 폭소.     


"그렇다면 인간과 다른 동물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기준을 '자유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동물도 감각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지요. 하지만 동물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만의 이성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치라는 일어서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꽃은 상태로, 배심원 앞을 계속 왔다 갔다 돌아다니면서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푸훗.. 정말... 학창 시절에 '연극 기법을 통한 효과적 변론술'을 제대로 배웠군.     

  

"그렇다면 말입니다. 안드로이드 '사사진' 정말 그런 '이성적 자유의지에 따라' 주인인 '사사'를 선택했을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지? 치라의 질문이 이상하다ᆢ고 느낀 순간,  지라가 작은 메모장 처럼 생긴 책 한권을 판사 앞에 내민다.     


"재판장님, 사사진의 어머니, 산드라 이바노브나 박사가 보낸 증거 자료를 제출합니다. 바로 사사진의 일기장입니다. "     


저런 게 있었어? 뭐지? 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기류는?ᆢ라고 생각하는 순간. 공중에 OHP스크린이 켜지고, 사사진이 어설프게 '그린' 글씨가 커다랗게 나타난다.     


    

우주력 xxxx 년 ㅌ년 ㅌ월

처음으로 이 '일기'라는 걸 써 본다! 흰 종이에 연필을 가지고 무엇을 긋는 행위가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인 줄 이제 알았다!     


"아! 이 부분은 넘어가겠습니다. 사사진의 '어린시절'ᆢ 그러니까 알파버전 시기의 일기라서요. "     


치라가 순간 당황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번에는  많이 정리된 글씨였.


      

우주력 xxxx 년 b월 ㅊ일

어머니께 많은 손님이 오고 갔다. 대체 저들은 누구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어머니가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인간의 나이로 20세에 해당하는 모든 지력, 사회적 적응력, 체력 등의 프로그램 설치와 업그레이드를 완료했으므로, 나를 맡길 내 주인을 선택해야 한다고.


원래 안드로이드는 주인을 선택할  없지만, 어머니 산드라 박사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에게 그 '선택권'을 주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모두 여성 인간이다)의 이름과 나이, 사진, 그리고 직업과 특징 등이 적힌 종이를 주시고, 그 중 맘에 드는 사람을 표시하라고 하셨다.         


1. 오만 칸(60) : 연방우주국 제1 보좌관. 우주국의 제2 권력자. (  )

2. 마틴 고메르(43) : 수성 최고사령관, 유니버설픽스대회 투포환 투척 금메달 수상자. (  )

3. 리아나(25) : 예쁘고 젊은 금성의 문화부국장이자 무용예술가. (  )

4. 사사(35세) : 지구인. 야심 많은 레위인(법조인). 우주재판소의 수장이 되는 것이 꿈임.  ( v )

5. 플랫(37세) : 화성인. 우주최고 프로그래밍 회사인 '국을'사의 회장 딸. (  )
 
 나는 4, '사사' 옆에 v표를 그리고 어머니께 드렸다. 나는 '사사'의 지적인 짧은 검은색 머리칼과 우수에 찬 갈색 눈동자가 좋았다. 그녀의 표정엔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지만, 안드로이드로 태어난 지 겨우 한 달째 된 내가(신체와 정신이 비록 20세일지라도) 그것까지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사사가 하는 일이 이 우주의 모든 차별적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킬 수 있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녀 옆에서 그녀를 돕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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