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 산드라의 집이 있는 해왕성의 거친 대기를 뚫고 우주로 날아갔다. 몇 개월 동안 내가 한 일은 그저 깜깜한 창 밖을 지루하게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지구가 나타났다.
지구는ᆢ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같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행성이었다!
나는 우주선 밖으로 보이는 까만 우주 속 파랗고 둥그런 점이 점점 커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런 내 옆모습을 보고그녀는 내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여운 것. 넌 지금부터 내 첩이니까 이름은 내 이름을 따라 '사사진'으로 해야 해ᆢ. '사사의 것'이라는 뜻이지."
나는 그날부터 그녀의 것이 되었다. 정확한 나의 신분은 그녀의 '첩'이다. 그녀는 인간 남성과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이지만 나는 절대 그녀의 '남편'이될 수 없다. 내가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이다.
막상사사의 집에 도착하자, 나는 조금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사의 집은 넓었지만, 해발 246m높이의, 층수로 따지면 60층 정도 되는 고층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땅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고속 엘리베이터'라는 이송장치를 이용해야만 했다. 물론 1초면 내려가기는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사사의 거실은 통유리로 된 벽면의 창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 벽은 온통 빨갛고 노란 페인트가 무작위로 칠해져 있었고 바닥에는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하여민법, 형법, 사법체계의 허와 실ᆢ 등등 각종 법률 관련 서적들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져 있거나 접혀있었으며,그 주변에는 코를 풀고 난 휴지와 귤껍질 등이 널부러져 있었다.
오직 잘 정리되어 있는 건 검정과 흰색 위주인 바지정장 세트 뿐이었다. 그것들은 드레스룸 안쪽 옷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검정 계열 양말과 함께ᆢ
나는 풀과 꽃과 과일이 달린 나무들을 더 보고 싶었다. 물론 '베렌다'라는 곳에서 '화분'이라는 항아리에 담긴 흙에 심겨진 식물들이 몇개 있긴 했지만ᆢ
나는매일 프로그램 되어있는 기상 시간인 여섯 시에 일어나사사를 위해 아침밥을 지었다. 나는 안드로이드니까 몇시에 일어나든, 사실 잠을 안 자도 상관없지만, 그녀의 아침잠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깨우지 않기 위해 정한 시간이다.
오늘 아침은그녀가 좋아하는 메뉴중 하나인간장에 재운 쇠고기와 야채를 함께 넣어 볶은 불고기와 콩 잡곡밥이다. 맛과 색과 영양의 균형을 중요시하는 그녀의기준을 잘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설정한 가장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와 톤으로 그녀를 깨운다. 사사는 오늘도 일어나기 싫은지 미간을 찌뿌리고, 발길질로 이불을몇번 찬다. 눈을 비비고, 나를 보더니 항상 하는 첫 마디를 던진다.
"옷이 그게 뭐니? 좀 멋있게 입으란 말야! 네 주인 욕 먹이지 말고..."
사사는나에게 무슨 옷을 어떻게 입으라고 구체적으로 주문한 적이 없다. 옷을 사준 적도 없다. 내가 그녀의 취향을 분석하여 직접 내 옷을 사 입을 수도 없다.
법적으로 안드로이드는 단순한 작업 등의 일을 할 수 있어도버는 돈은 모조리 주인의 통장으로들어간다. 나는 내가낮에 일하는 편의점 점원 업무와 간간히 들어오는 안드로이드 모델 일에서 얼마의 수익이 나는지도전혀모른다. 그래서할 수없이사사와 '혼인계약'을 맺기 전에 입었던 옷을 매일 바꾸어 장착한다.
하지만 사사의 이러한불평과부당한대우에도 나는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력 1020년에 제정된안드로이드 행실법은 이렇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2조 제1항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일을 제외한 주인의 요구에 최대한 부응하여야한다.
제 3조제 2항 : 주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주인에게 불경한 말투를 사용해서는 안 됀다.
이상의 안드로이드 행실법(안행법) 위반 시에는 혼인계약 파탄의 책임을 물어 재판에서 불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이 법에 따르면...최악의 경우에는 주인의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메는 ‘주인 없는 안드로이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유기된 안드로이드만을 골라 음성적으로 판매하는 불법 상인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안드로이드의 사회적 위치는 개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과 똑같다.' 고 인식되었다.
#우주력 1042년 5월 17일
<사사진>
그날은 사사의 대학모임, 각 전공별선후배와 동기들이 모두 자리하는 '홈커밍데이'였다.대학 연합 모임이라 규모도 컸다. 정치, 경제 및 사회의 거물급 인사들이 모여서 사교를 하며 남몰래 고급 정보를 교환하는 자리다.
나는 사사의 '트로피 첩(Trophy Concubine)'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최대한 멋지게 꾸몄다. 남성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상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흰색 드레스 셔츠 위에 살구색 스웨터를 겹쳐 입는다.
사사는 이날을 위해 특별히 비축해 둔 스페이스 코인 1500스코를 지불했다.(먼 옛날 지구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서기 2000년대 화폐단위로 환산해 보면 대략 150만 원가량 된다.) 고급 지구산 양모를 사용하여 부들부들한 촉감과 세련된 파스텔톤의 빛깔이 예술이다.
지구에서는 품질과 관계없이 브랜드 가치만으로 소비자들이 같은 상품의 최소 열 배에 달하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제품을 '명품'이라고 했다는데, 진정한 품질로만 명품을 따지자면 이런 게 정말 명품이 아닐까 싶다.
“아!” 사사는 자기 서재로 돌아가다 말고 화장대 위에 놓인 향수를 집었다. 역시 100년 전 지구산, 은은한 담배 향기를 내뿜는 ‘롤리타바코’다. 치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어깨 위로 알코올 90%의 액체가 뿌려진다.
“난, 너에게서 그 옛날 지구의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
사사가 내 얼굴 앞에서 코를 들이민다. 이건 500스코에 해당한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역시 그녀의 취향은 매우 독특하다.
그런데 난, 왠지 그 향수가 싫다. 냄새도 그렇지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롤리타 바코’인지, ‘롤리 타바코’인지 좀 헷갈린다.
《롤리타》(영어: Lolita)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지구력 1955년에 쓴 소설이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가 사춘기 소녀 돌로레스 헤이즈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소설의 제목 '롤리타'는 돌로레스 헤이즈(Dolores Haze)의 애칭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내용만큼이나 참신한 소설 스타일로 유명하다. 유머와 비극적인 요소가 골고루 섞인 희비극으로, 뛰어난 작품성과 금기시되던 주제로 …
눈 앞 공간에 화면처럼 '롤리타'에 관한 정보가 뿌려진다. 아. 이건 사사의 명령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출력되었을까?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라는 것이 안드로이드인 나에게 있을 리가...
"자, 이제 전에 네게 입력해 둔 파티 초대 인사들 이름과 직책, 출신 대학과 성격, 취미 리스트를 모두 분석해서 가장 적절한 응대 방식을 추출해 내도록 해. 네 본분을 절대 잊지 말도록."
명령을 전달하고, 사사는 일부러 나에게 바쁜 듯한 모습을 내비치고 싶은지 코트를 휘날리며 외출한다. 파티에 참석하는 거물급 인사들에게 선물용으로 바칠 로마네 꽁띠 그랑 크뤼 와인이라도 사려나.
사사는 이제 막 재판연구관이 되었고, 우주 법정 제1 판사를 꿈꾸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장식품은 바로 나. 사사진이다.
레위인. 우리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라는 직책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여성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몇 안 되는 남성 인간들은 법원의 서기 또는 정리 역할을 담당했다. 사사는 법대 출신 친구들과 선후배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승진을 위한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 레위인들이 사교 모임을 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TC, 즉 잘 생기고 분위기 잘 맞추는 사교모임 장식용 안드로이드, 트로피 첩이다.
사사가 비싼 돈을 지불하고 나를 어머니인 산드라 박사로부터 사서 데리고 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