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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정필 Oct 28. 2022

아버지를 뵈러 가는 날

  햇살 두꺼운 일요일 아침, 내 손놀림이 바빠진다. 어젯밤 끓여 놓은 김칫국과  계란 프라이로 가족의 아침상을 간단하게 차린 후, 튀김 솥에 식용유를 붓는다. 기름의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 새우 한 마리를 넣어본다. ‘따다닥’ 새우가 뜨거운 기름 위로 떠오르며 몸을 움츠린다. 한 마리, 두 마리 튀김 솥 가득 새우를 튀겨 내고, 동태에 계란 옷도 예쁘게 입힌다. 튀김 냄새에 이끌려 딸아이가 다가오더니 새우튀김 한 마리를 입에 물며 “엄마 오늘 할아버지 산소 가” 묻자 “그래 오늘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뵈러 갈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오늘은 10년을 훌쩍 넘어 우리 곁을 떠나가신 아버지 산소에 가는 날이다. 다가오는 수요일이 아버지 기일인데, 코로나 확산으로 큰언니와 셋째 언니 그리고 나는 참석이 어려워 며칠 앞질러 오늘 가기로 했다. 나는 모둠전과 떡을 준비했고, 언니들은 과일과 술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생전 즐기시던 ‘믹스커피’를 준비한다고 했다.


  그해 겨울. 아버지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던 날, 새벽부터 내린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간밤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밤을 새운 친척들은 아침부터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상여를 메야하는데 큰일이다.” “이리 눈이 많이 와서 산을 오르겠나?”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친정은 시골이라 그때까지 전통방식으로 상여를 메었다.

  오전 9시를 넘기자 상여꾼들이 하나, 둘씩 집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상여꾼과 지인들 그리고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아버지의 초상은 동네에서 몇 안 되는 ‘큰 초상’이 되었다. 그리고 오빠들은 팔 남매 키우신다고 고생하신 아버지 초상에 소 한 마리를 잡았다. 우리는 상여꾼들에게 소고기 푸짐한 아침 식사를 대접하며 아버지 가시는 길 안전하고 편안하게 잘 모셔다 드리기를 부탁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상여가 나가려 하자, 그렇게 내리던 함박눈이 그치고 매서운 2월의 날씨가 봄날처럼 포근했다. 

  상여는 집을 출발해서 평소 아버지가 자주 다니시던 길모퉁이를 지나고 경로당을 그쳐 들판으로 나갔다. 몇십 년째 아버지의 부지런한 손길이 머물던 논에 잠깐 머무르다가 ‘자골’(골짜기 지명)로 들어가는 청수 다리 앞에서 멈춰 선다. 상여를 선봉에서 이끌던 큰오빠 친구는 “상여가 힘이 없어 못 가겠다.”말하며 노자 돈을 요구했다. 큰오빠와 둘째 오빠가 얼른 나서서 현금을 내자 상여는 열 걸음쯤 옮기다가 다시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며 “이 집에는 아들밖에 없나? 딸은 어디로 갔나?”하며 우리 네 자매를 바라본다. 언니들과 나도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여러 번 밀고 당기고 하더니 노자 돈은 현금과 상품권, 카드까지 다양하게 채워졌다. 자식들이 ‘가시는 아버지’를 위해 노자 돈을 푸짐하게 지급하니, 상여는 힘을 받아 질퍽한 논을 지나 산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그렇게 14년 전 함박눈이 오던 포근한 날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아버지께서 저세상 가셨던 그해 12월 나는 결혼을 했다. 막내딸 시집 못 보내고 가셔서 마음의 짐을 지고 가셨던 아버지였는데, 그 마음을 내가 헤아렸는지 나는 그해를 넘기지 않고 시집을 갔다. 결혼을 한 후, 명절날만은 아버지 산소를 빠지지 않고 꼭 둘러보리라 생각했었는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날씨 좋은 날은 아버지를 뵈러 산을 오르고, 춥고 흐린 날은 어린아이들 핑계 삼아 남편만 보냈었다. 그렇게 내 삶이 바빠 한동안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이라서 들뜬 마음이었을까? 몇 칠전부터 장을 보고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했다. 노력에 비해 단출해진 음식에 실망하며 친정으로 향했다. 언니들과 오후 1시 30분 자골 골짜기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급하게 운전하다 신호등에서 급브레이크를 밝았다. “쿵”뒤 좌석을 돌아보니 음식이 앞으로 쏠려 뒤죽박죽 엉켜있다.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급한 운전 덕분에 제시간에 도착을 했고, 언니들도 내 뒤를 이어 차례로 도착했다. 우리 자매는 준비한 음식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며 칠 사이 꽃샘추위에 두터운 패딩을 입고 나섰는데 그날은 아버지 가시는 날처럼 포근하여 패딩 속으로 땀방울이 맺혔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소나무 잎들이 퇴색해서 떨어진 ‘갈비’가 길을 덮고 있었다. 갑자기 나를 앞지르던 셋째 언니가  “불소 시계 갈비다. 갈퀴로 끌어가서 집 아궁이에 불 지펴야지. 갈비는 엄마 잘 끌어 모았는데.”하며 어릴 적 기억을 회상하며 웃는다. 그 뒤를 따르던 큰언니가 “아버지는 금방 타면 없어지는 갈비보다 오래 타는 나무를 좋아하셨지. 아버지 덕분에 우리 방구들은 겨울 내내 따뜻했다. 물론 아침에 방이 식어 이불 경쟁이 치열했었지만. ㅎㅎ” 덩달아 웃는다. 그렇게 우리 자매가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워하는 사이 아버지의 산소에 도착했다.

  처음 아버지 산소는 산 중턱에 서쪽 방향을 보고 있었다. ‘풍수’를 보고 명당이라 해서 ‘묘’를 썼는데, 그해부터 묘를 덮은 잔디와 산소를 에워싼 사철나무들이 죽기 시작했다. 해마다 식목일 날 잔디를 심었지만 소용없었다. 엄마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하시며 오빠들에게 묘를 이장하자고 제안했다. 오빠들은 다시 풍수를 보고 산 중턱 남쪽 방향 아버지 묘를 이장했다. 그 후 잔디며 사철나무는 남쪽의 따뜻한 햇살을 받아 푸르게 잘 자랐고 우리는 매해 벌초하기 바빴다. 

  우리 자매는 준비한 음식을 묘지 앞에 차리고 아버지께 인사를 했다. 큰언니는 “아버지 오랜만에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고, 셋째 언니는 “아버지요. 그동안 잘 계셨지요. 남쪽이라 햇살이 참 따뜻해서 좋지요.”라고 말했으며, 나는 “아버지요. 오는 길에 급브레이크 밝아서 음식이 뒤죽박죽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했다. 모두 한 마디씩 하고 절을 했다. 셋째 언니는 아버지가 생전 좋아하시던 믹스커피를 산소 위에 둘러가며 뿌렸고, 우리는 햇살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아 음복을 했다. 언니들은 내가 해온 튀김과 찹쌀떡이 맛있다고 했고, 나는 언니들이 가지고 온 금귤을 맛나게 먹었다. ‘여자 세 명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옛말처럼 세 딸들의 수다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아버지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하고 산을 내려왔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살뜰하지는 않으셨지만,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셨고, 누구보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셨다. 어려운 시절, 보리밥을 먹여도 가족을 굶긴 적이 없었고,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먼 길을 걸어서 약을 지어 오셨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들 교육시키느라 많은 빗이 생겨도 흔들림 없이 아버지만의 부지런함과 신용으로 우리들을 지켜내셨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 우리는 풍부하진 않아도 부족함 없이 살았다. 또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손에서 농사를 놓지 않으셨다. 철없는 자식은 그것이 부모의 책임감이라 생각했었는데, 부모가 되어보니 그것은 책임감을 넘어선 ‘깊은 사랑’이었다.

  아버지를 뵙고 온 날, 나는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아버지 그 시절에 아버지가 계셔서 우리는 따뜻했습니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삶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다 문득문득 아버지가 그리운 가 봅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우리 자매 소풍 가는 마음으로 자주 뵈러 갈게요. 그때 시끄럽더라도 ‘에헴’헛기침 한번 해주시고 반갑게 맞아 주세요. 이번 추석에 송편과 햇과일 들고 찾아뵐게요. 아버지 막내딸이 많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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