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장마의 끝자락에서 초복을 핑계 삼아 ‘추어탕’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삼복더위에 미꾸라지를 품은 뜨거운 뚝배기를 마주한다는 것은 남다른 용기를 필요로 했다. 옛말에 ‘이열치열’이라 하는데, 오십의 목전에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아가니, 나도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한여름 무더위에 ‘추어탕’을 즐기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몸보신’을 위해, 한여름 뜨거운 아궁이 앞을 마다하지 않고 미꾸라지를 ‘푹’ 고어 시던 엄마의 영향이다.
이린 시절, 외갓집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나는 외숙모의 양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외갓집은 우리 동네 마을회관 앞 가장 큰 기와집이었고, 계절마다 봉숭(과일)들이 곳간에 가득했다. 많은 가족(8남매)에 여유롭지 못한 우리 집과 달리 커다란 집에 먹을 것도 많은 외갓집은 어린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그 시절, 동네의 몇 대 안 되는 텔레비전이 외갓집에 있었고,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김일 선수
레슬링‘을 방송하는 저녁이면, 우리 자매는 어김없이 외갓집으로 향했다. 자신의 집이라고 ’ 여유만만‘해 하는 외사촌 오빠들과 달리, 언니와 나는 저녁을 준비하시는 외숙모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부엌을 들락날락하며 저녁식사를 도왔다. 외갓집 여섯 식구에 우리 자매가 더해져, 비좁아진 방안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외숙모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저린 다리를 주물러야만 했다. 드디어 구수한 밥 냄새와 함께 기다리던 저녁 밥상이 들어왔다. 고춧가루가 뒤범벅된 빨~간 김치와 뚝배기 속에서 넘칠 듯 말 듯 ’보글보글‘ 끊어 오르는 구수한 된장찌개~~ 나는 입속의 침을 수도 없이 삼켰다.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김치와 된장찌개였지만, 음식 솜씨가 좋은 외숙모의 손맛이 더해지니 별미가 되었다. 밥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마음과 달리 “너 그는 이제 집에 가거라”라는 외숙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귀에 박힌다. 못내 아쉬운 듯, 저린 다리를 주물이며 집으로 향했다. “쯧쯧쯧~, 자들도 밥 좀 먹여 보내지” 등 뒤로 외손녀들을 보내는 외할머니의 안타까운 한숨이 자그마케 들려왔다.
언니와 나는 외숙모의 ‘모질 함’을 탓하며 사릿 문을 들어섰다. 마당 가득 퍼져있는 모깃불 연기 사이로 어렴풋이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 무더운 여름밤, 아궁이 앞에서 ‘콩죽’ 같은 땀을 흘리시며 무언가를 끊이고 계셨다. ‘처르렁’ 무쇠 솥뚜껑을 열어젖히니, 구름 같은 수증기가 올라오고, 비릿한 냄새와 시래기 삶은 냄새가 온 마당에 진동했다. 우리는 예감했다. 오늘 새벽 통발로 잡은 미꾸라지가 솥 안에서 ‘팔딱팔딱’ 뛰고 있다는 것을~. 평소 ‘추어탕’의 비린 냄새를 싫어하는 나였지만, ‘시장’이 반찬이었을까? 그날 밤, 미꾸라지 뼈까지 다 녹아든 ‘추어탕’은 걸쭉하니, 국물이 진하고 구수했으며, 여름 시래기는 부드럽고 달았다. 외갓집 저녁밥상의 아쉬움은 진 작에 모깃불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엄마의 최고 음식은 ‘추어탕’이 되었고, 그 음식은 뜨거운 여름의 원기를 보충해 주는 ‘가족 보양식’이 되었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타고난 ‘젬 뱅’(많이 부족하다)이었지만, 엄마의 그런 부분까지도 품어주시는 든든한 ‘사랑꾼’ 아버지가 계셨다. 어려운 시절을 겪어 오신 아버지는 ‘못 먹는 것 외에는 다 먹을 수 있다’라며 음식 투정 한 번 안 하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엄마의 음식 솜씨를 탓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본능은 속일 수 없었는지, 가끔 회관 앞 외갓집에서 운 좋게 저녁을 먹고 오는 날이면, 마치 진수성찬을 대접받은 듯 만족한 얼굴로 싸리문을 들어섰다.
외숙모는 ‘남호 선호 사상’이 강하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여 외할머니와 자주 부딪쳤고, 주위 사람들 마음에 잦은 생채기를 냈다. 누구보다 인자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외할머니는 외숙모와의 갈등이 담 넘어 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혼자서 화를 삼키시다 마음의 병을 얻으셨다. 저세상 가시는 날까지 가슴속 응어리를 풀지 못하셨던 외할머니는, 내 기억 속에서 항상 안타까움과 눈물이었다.
그 이후로도, 외숙모의 저녁밥상에 미련이 남아 ‘김일 선수 레슬링’을 몇 번 더 보았지만, 가슴속 상처가 미움으로 변하면서 외숙모의 양녀를 포기하고, 외갓집과 멀어졌다.
어린 시절, 엄마의 손맛을 탓했는데, 부모가 되어보니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었다. 한 푼이 아쉬워 고추 가루를 아껴야 했고, 된장찌개에 멸치 한주먹을 마음 놓고 넣을 수 없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또한 외갓집의 빨갛고 동그란 사과와 달리, 한쪽 귀퉁이가 석었거나 상처 난 사과를 가득 사 오셨던 그날도, 8남매 어느 자식 하나 소외되지 않고 다 먹이려는 어머니의 지혜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주말 엄마가 따놓은 ‘메리골드 꽃’을 가지러 친정을 방문했다. 그렇게 커 보이던 외갓집은 주위의 양옥집에 묻혀 작은 시골집이 되어 있었고, 외할머니 앞에서 큰소릴 치며 기세 등등하시던 외숙모도 반백 발이 되어 집만큼이나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항간에 치매가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날의 미움에 앞서 ‘짠~한’ 연민이 밀려왔다.
나이가 쌓여가면서 어머니는 당신을 닮지 않은 딸들의 손맛에 묻혀 사신다. 어릴 적부터 ‘요리사’라는 별명을 가진 셋째 언니는 ‘곱창집’을 하면서 매해 겨울 김장을 책임지고, 간간히 맛난 음식을 만들어 친정을 방문한다. 다른 딸들도 제각기 손맛을 뽐내며 엄마의 냉장고를 채우니, 엄마의 든든하고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해마다 여름이면 기력 보충을 위해 추어탕을 찾지만, 그 여름밤 평상에서 모기를 쫓으며 먹던 구수한 엄마의 추어탕~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다가오는 이번 여름에 엄마의 그 옛날 ‘추어탕’ 한 그릇 먹고 여름 더위와 맞서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