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못 속이는 거라며 나의 세포들은 이미 휴식을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수요일 오후 외래, 환자는 30 여명으로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진료실에서 직접 초음파를 6명 봤고, 임신과 출산에 관한 걱정과 질문을 가진 산모 (혹은 그 남편) 들에게 각각 답변하며 외래를 마친 시간은 오후 4시 반이 넘었다. 외래가 있는 별관에서 내 방이 있는 암센터로 걸어갈 기운이 없었던 나는 별관 4층 당직실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낮이라 잠이 잘 오지는 않았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나의 세포들에서 휴식을 제공하려 노력했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병동과 분만장에서 4번의 전화를 받았다.
개인병원에 전원된 임신 21주에 양막이 노출된 산모의 진료를 마친 시간은 오후 7시였다. 오늘의 밤당직을 버티기 위한 신체 영양 공급을 위해 병원 식당으로 가서 음식들을 입 속에 넣었다.
이후 나는 방에서 내일 대한산부인과학회의 미래위원회-보험위원회의 합동 워크샵에서 발표할 [산과 교육 붕괴에 따른 인력 양성의 현실] 이란 제목의 강의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이런 강의를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 산과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냥 내 앞에 닥친 일이니 안 할 수도 없는 그런 일이었다.
오후 8시 반쯤 입원시켰던 산모의 피검사 결과들이 모두 나왔다. 다행히 자궁내 감염이 의심되는 소견은 없었기에 자궁경부를 묶는 수술을 진행해야 했다. 그런데 과연 이 수술을 오늘 밤에 할 것인가 아니면 내일 아침에 할 것인지 고민되었다. 초응급수술은 아니었고 나의 근육세포들과 뇌세포들은 이미 각자 신체적, 정신적 노동으로 자신들의 에너지를 고갈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근육세포들에게 휴식을 더 주기로 결정했다. 즉 수술을 내일 오전으로 미루는 것으로 하고 강의 준비를 마무리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파워포인트와의 싸움을 한참 하고 있었던 새벽 2시에 분만장에서 또 전화가 왔다. 경기도의 한 분만 병원에서의 연락이었고 임신 27주 쌍둥이로 조기진통이 걸린 산모의 전원 문의였다. 이미 자궁문이 3-4cm 정도 열렸다고 하니 급한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해당 병원에서는 이미 여러 대학병원에 문의했지만 전원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였다. 나는 신생아중환자실 의료진과 상의 후 이 산모의 전원을 받기로 결정했다. 27주 쌍둥이 임신의 조기진통은 진행이 빠른 경우가 대부분이라 우리는 오자마자 수술할 것에 대비하여 여러 준비를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산모가 도착 후 내진(진찰)을 해보니 자궁문은 이미 다 열렸고 첫째 아기의 머리가 질 쪽으로 상당히 내려와 있어서 초응급수술을 진행해야 했다. (둘째 아기가 역아로 있었기 때문에 산과적으로 수술 적응증에 해당하였다.) 수술 전 검사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산모는 아래로 힘이 들어간다고 했기에 (산도인 질 쪽으로 아기 머리가 내려오면서 아기가 나오기 직전에 호소하는 증상이다.)
응고 검사를 포함한 피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상황인 바, 전신마취가 결정되었다. 마취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산모의 다리를 오므려 혹시나 아기가 질을 통과하여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술 준비로 복부를 소독약으로 닦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산모의 다리 사이를 지켜보며 혹시나 아기 머리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드디어 수술이 시작되었다. 피부와 피하지방층을 메스로 긋는 순간 작은 동맥이 터져 피가 솟구치면서 나의 목까지 튀었지만, 개의할 일은 아니었다. 원래 전신마취 하에 진행하는 제왕절개수술은 가급적 빨리 아기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피를 잡지 않고 자궁에 도달한다. 나는 산도에 끼어 있었던 첫째 아기를 퍼 올렸고 연이어 역아로 있던 둘째 아기를 꺼내 인큐베이터 위에 올려 놓으며 소아과 의료진에게 전달하였다. 두 아기는 모두 1kg 정도로 태어났고 다행히 약간의 자발호흡도 있었다.
만약 이 산모가 우리 병원에 오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또는 이 병원에 오는 동안 차가 막히거나 눈비 등 기후가 나빠 오는 시간이 20분 더 지체되었다면?
만약 내가 이미 전원 받은 다른 환자의 자궁경부봉합수술을 하고 있어 이 산모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
또는 우리 병원의 신생아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이런 기사가 났을 것이다.
40세 노산, 시험관 임신을 통해 어렵게 가진 아기, 앰뷸런스에서 태어나.
134번째의 당직은 이렇게 또 아찔하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