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슬슬 일어날까?
그가 초저녁잠이 많은 것도 집안 내력이다.
밤 9시가 되자 평소처럼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팔베개를 베고 이리 눕고 저리 눕고 뒤척여 보지만 그녀의
미소가 유령처럼 떠돌았다.
깜박 졸다 보니 벌써 동이 튼 것인지 창문이 불그스름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다.
습관처럼 언제나 정겨운 친구 라디오를 켰다.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살찌는 것 같다.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벌써 7시다. 재빨리 일어나 이부자리를 갰다.
아침 7시면 조반을 먹는 시간이다.
노모는 삼십 년 동안 아침밥 먹는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평안도가 고향인데 남한으로 피난 와서 지독하게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일평생 부지런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밭에서 일하는 것도 젊은 사람
뺨치게 일을 잘했다.
밥상에 앉아 빙 둘러보았다. 찬이라야 마늘장아찌, 무짠지,
깻잎장아찌, 두부를 넣은 김칫국이 전부지만 장가를 들지
못한 아들이 불쌍하다고 아들 옆에서 자는 노모였다.
찬수는 김칫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넘기고 방을 나왔다.
지역민들끼리 강에서 붕어와 메기, 쏘가리를 잡아 대교
밑에서 매운탕 끓여 먹거나 양수장 옆수로에서 팔팔 뛰는
물새우를 뜰채로 건져 올리니 새우가 많이 잡혔다.
끓여 먹다 보면 여름 한가운데로 떠밀려 왔다.
여름이면 더우니 복달임 한다고 염소탕이나 삼계탕을
끓여 음악을 들으면서 소주랑 곁들여 먹다 입가심으로 커피를
배달시킨다. 8킬로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다방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보온병에 끓는 물을 담고 머그잔에 커피 가루와 프림,
설탕을 넣고 보온병에 가져온 뜨거운 물을 따른다.
티스푼으로 설탕과 커피를 휘휘 저어 한 잔씩 건네준다.
3잔 주문하면 보통 다섯 잔이 온다.
커피 배달 온 아가씨가 상도 봐주고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한잔씩 하며 차에 설치된 노래방에 흘러나오는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아가씨의 어깨를
주무르고 음담패설을 던지는 것이 시골 사내들의 문화였다.
어느 날 형사처럼 눈매가 날카롭게 생긴 사내가 그의 집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노모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 누고요? 왜, 남의 집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기야?
찬수가 화를 버럭 내자 사내는 말없이 돌아갔다. 노모는
굽은 허리를 펴며 막내아들 눈치만 보고 노부는 아파서
말도 못 하고 자리보전하고 있었다.
찬수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꾼 돈을 갚으려고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다 갚고 나면 손에 쥐는 건 한 푼도 없고 오히려 모자랐다.
'그럴 바엔 한 번 더 당겨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공부방으로 향했다.
공부방에 가니 서너 명이 거나하게 취해 화투패를 돌리고 있었다.
그때 낯익은 남자가 한 마디 툭 던진다.
- 형씨, 난 형씨가 간이 작아서 영원히 사업장에 나타나지
못할 줄 알았지, 뭐여? 오늘도 돈 따면 화장실에 가는 것 아녀?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행차하셨나? 지난번 당긴 돈 풀어서
늘려가려고 온 거야? 벌써 간이 콩알만 해지네! 탱글탱글한 아랫
도리가 바짝 오그라드네, 아이 무서워라!
그 말에 찬수는 기가 죽을세라 큰 소리로 말했다.
-사업차 지방에 일이 생겨서 갔다 오느라고 그런 거지, 무섭긴 뭘?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사내가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화투판이 생각보다 컸다.
1점당 이천 원이지만 찬수는 질세라 열심히 패를 돌렸다.
점수가 오르기 시작하여 앞자락에 지폐가 쌓였다. 찬수가 슬슬
일어날까? 엉덩이를 들먹일 즈음 쥐구멍이라도 생긴 듯 천만 원이
야금야금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