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압만록>>에 이런 야화가 있다.
영명위(정조 사위) 홍현주의 전생은 역관 아들이라 한다.
한 역관 아내가 그 아들이 죽고 과부가 된 며느리와 함께 동현(銅峴-구리개 을지로 1·2가) 약국의 옆방에 살았다.
하루는 꿈을 꾸니 죽은 아들이 나타나
“죽어서 귀한 가문에 환생해 임금 부마가 되어 내일 이 앞을 지나갑니다.”
꿈을 깨어 며느리에게 얘기하니 며느리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날 영명위 홍현주가 혼례를 올리기 위해 그 앞을 지나면서 약국 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는데, 역관 아내와 며느리가 보니 죽은 아들과 꼭 닮았다.
뒤에 영명위가 듣고 쌀과 비단을 보내주었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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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주는 1793년에 태어나 1865년까지의 인물로 정조의 서차녀 숙선옹주의 남편이다.
부마로 간택되어 영명위의 호를 받고 순조 4년 5월 27일 1804년 숙선 옹주와 가례를 행하였다.
홍현주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역관의 아들을 찾아보니 역관 김의서의 아들 김범우가 있었다. (1751년 5월 22일 ~ 1787년 9월 14일)
김범우는 정조 때의 천주교인으로 천주교도 중 첫 번째 희생자였다. 세례명은 토마스.
부친 김의서는 사역원 판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남양 홍씨 홍억석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경흥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김익한이다.
김범우는 학문을 좋아하여 이벽과 친하게 지내다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명례방 구역의 그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자주 가졌다.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가 도박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여 천주교 성상(聖像)과 서적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대부들은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김범우와 최인길 만을 가두었다.
이것이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또는 ‘명례방 사건’이다.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고 그의 책들은 형조의 뜰에서 분서되었다.
그리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보냈는데, 이것은 천주교를 금한 최초의 공문서이다.
김범우는 장형(杖刑)을 당한 상처가 덧나 유배 1년 만에 죽었다. 1786년 (정조 10)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 구역의 집이 최초의 천주교 예배 장소라는 역사적 의의에 따라 그곳에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시간 순서로 보면, 1786년 김범우가 사망하고 1793년에 홍현주가 태어나 열두 살이 되던 1804년에 숙선옹주와 가례를 올린다.
<<계압만록>>의 설화는 김범우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설화로 풀어놓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