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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향나무 Mar 19. 2024

인간혐오 = 자기혐오 = 고장 난 신호등 = 종이접기

요즘 인간 혐오가 생겼다.

원래도 사람을 인간을 좋아하진 않았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누굴 이유 없이 미워한다거나 이유 없이 싫다거나

타깃이 정해진 게 아닌

인간 자체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졌다.


대화를 주고받거나 말을 나눌 수 있는 건 사람 외에는 없다.

그래서 대화를 주고받고 나누고 싶을 때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사람한테 말해야 한다.

문득 대화가 무의미하고 남는 것도 얻는 것도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에

인간과 대화를 하는 게 싫어지고 인간을 가까이 두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어쩌자는 거지? 뭐 어떻게 해달라는 거지? 그래서 뭐?”라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그 친구의 이야기는 누구나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나 역시 주변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내가 든 생각들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 어쩌라는 걸까 뭐 어쩌자는 거지 그래서 뭐?‘라고 생각하겠다 싶었다.

그러니 누구에게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내 얘기도 남는 것도 얻는 것도 없이 무의미하니깐.

그래서 ‘대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한 사람이 그러더라

: “과연 너의 주변 사람들이 너의 이야기가 의미 없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라고 들을까?”

: “그리고 의미가 꼭 있어야 되는 이유가 있어?”

: “그럼 이때까지 대화들은 항상 의미 있어서 나눴던 거야?”


: “아니”

: “아니”

: “아니”

 


그 사람이 한 모든 질문의 대답은 “아니”였다.

의미라는 건 없다

의미가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이며

단지 전에는 의미를 부여했다면

지금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뿐.

어쩌면 사람인 내가 사람을 싫어지는 것 같다는 건 나를 싫어한다는 것과 비슷했다.

나를 싫어하는 마음이 든다는 건 지금 내가 힘든가 보다.


빨간불도 파란불도 아닌 아무런 불도 들어오지 않는

고장 난 신호등이 되었다.

신호등 하나 없어져도 어떻게든 길은 건널 수 있으니

하나쯤 없어지는 게 무슨 의미냐며

버렸나 보다.

사실 버려지지 않길 원했다.

누가 버리지 말라고 얘기해 주길 바랐다.


이럴 때면

세상이 따듯했으면 좋겠다가도

”됐다 말자“ 싶다가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너덜너덜해져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냥 새 종이를 꺼내는 거 아닐까 싶다.


새 종이를 꺼내 접어도 똑같을 수 있겠지만,

너덜너덜한 종이로는 뭘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깐

그렇게 얻은 새 종이로는 잘 접어보자고

자도 준비하고 책상도 준비하고 종이접기 책도 준비하겠지

마음을 다잡으면서 다시 접기 시작한다.


여전히 너덜너덜한 종이를 버리는 건 쉽지만 새 종이를 꺼내는 건 쉽지 않다.

혹시 매번 새 종이를 꺼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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