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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바쿠닌] EH Carr

by YT

[미하일 바쿠닌]을 읽고자 마음먹은 것은 지난 몇 달 전인듯하다. 주식시장에서의 음모, 정치의 음모, 이 세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음모에 빠져 버린 듯했고, 특히 이러한 것들이 모두 권위로 다가왔다. 터키의 ‘비상 상황’도 이런 인식에 한몫을 한 것 같다. 은연중에 마치 물처럼 스며드는 권위의 느낌은 자꾸 화를 키우고, 슬슬 분개로 발전한다. 권위와 억압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것의 최고 집합체인 국가는 없어질 수 있을까? 국가는 무엇인가? 이런 고민의 와중에 어렴풋이 알고 있는 아나키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보려 했다. 그래서 EH Carr의 명성을 믿고 바쿠닌의 전기를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역자의 서문을 읽으면서 ‘나에 대한 글을 나를 잘 모르는 내편이 만들기보다는, 나를 잘 아는 반대편의 인물이 나에 대한 바른 전기를 쓸 수 있다’는 말이있다. 하지만, EH Carr는 바쿠닌 편도 반대편도 아닌듯하다. 주로 개인의 사생활에 많은 부분 중심을 두어, 마치 바쿠닌을 양아치 수준으로 전락시킨 듯한 인상이다. 바쿠닌에 대한 자료와 기록이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바쿠닌에 대해 알고 싶고, 아나키즘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EH Carr의 [미하일 바쿠닌]은 적당한 책이 아니다.

권위와 국가는 철폐될 수 있다. 난 그의 전기에서 1800년대의 유럽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느슨한 형태의 연합이 국가를 대체하고,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아이디어 일 수 있다. 그런데, 구 소련의 경우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권위가 생기고, 도드라지고, 마침내는 그전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억압 기관으로 바뀌는 현상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바쿠닌에게서 볼 수 있는 ‘열정’에서 그 답을 끌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 열정에서 우리는 ‘의식된 도덕’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 의식된 도덕은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자유는 억압되어야 한다. 타자나 국가에 의한 억압이 아니라 철저히 나에 의한 억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도덕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억압이 나에 한정된다면 모르지만 사회로 확장된다면, 어떻게 될까? 각각의 크기가 너무 달라서, 과연 그것을 사회에 보편 적용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영화 가타카나, 영화 다이버전트가 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균일한 도덕 주사를 주입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일지 모른다. 영화는 얘기한다. 그 주사를 놓는 사람이 바로 권력이고 억압이라고…, 이러면 우리는 영원히 억압과 권위를 탈피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마 교육을 통한 각성과 도덕의식 수립이 개인차원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지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것은 모두가 부처가 되는 길이다. 우리 모두 부처가 되자. (미안합니다. 또 부처가 나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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