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에게서 느껴지는 동양 철학의 향기
[선악의 저편]을 읽고
210장에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중국인’이라는 저 유명한 칸트에 대한 조롱이 나온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니체 이전에 중국철학은 서양의 선교사들을 통해 번역되어 상당히 폭넓게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읽혔다고 한다. 중국학 유행의 중심에는 주자가 해석한 다분히 이론적인 공자와 맹자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니체는 칸트의 윤리 철학적 측면을 유가의 도덕철학적인 면에 빗대어 ‘쾨니히스베르크의 중국인’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이미 유행했던 중국철학에 대해, 문헌학자로써 니체는 이미 중국철학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니체 철학 곳곳에서도 공맹의 향기, 노장의 향기, 심지어 붓다의 연꽃향이 난다. 그래서 [선악의 저편]에서 맡은 매우 주관적인 향기를 몇 개 풀어본다.
43장 ‘선’이라는 것은 이웃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때 더 이상 선이 아니다.
이 장은 정확하게 노자 도덕경의 첫 문장(道可道非常道, 命可命非常命)과 일치한다. 모든 사람이 이야기하는 선은 모든 사람들의 교집합 같은 것으로 가장 적어진 선이다. 니체에게 ‘공통선’이란 쪼그라든 선으로, 이것은 미래의 철학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사람들을 평균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뿐이라고 비판한다.
227장 성실함, 만일 이것이 우리 자유정신이 벗어날 수 없는 덕목이라고 한다면 ~(이후 전체)
우리의 덕을 실행함에 있어, 니체는 성실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본다. 성실함(誠)은 동양 고전 '중용'의 핵심 개념이다. 하지만 성실함은 인류 보편의 가치이고, 굳이 동양의 향기가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 (니체 식으로 대답해보자!) ‘나는 그렇게 읽었다!’ - 성실함은 지치지 않고 자신을 완성해 보고자 하는 것이고, 엄격한 태도이다. 이런 성실함은 보통사람들에게 ‘악마적’으로 비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하며, 개의치 말기를 당부한다. 흔들리지 말고, 권태로워지지 말고, 허영이 되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 자기 자신만을 믿고 가는, 스스로가 기준을 만들어가는 그런 창조적 성실함을 이야기한다.
248장 천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 (이후 전체)
서양 철학적 전통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숙명/결정론적인 분석을 민족에게 가하고 있다. 민족을 씨를 뿌리는 민족과 그것을 키워내는 민족으로 구분하는데, 유대인, 로마인 그리고 독일인은 씨앗의 민족이고, 그리스인과 프랑스인들은 토양의 민족으로 구분한다. 이것은 마치 정해진 기질과 운명을 생각나게 하며, 동양적 정서의 기반에서 썼다고 하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마크툽’ 같은 느낌을 준다. 어쩌면 '주역'의 느낌도 강하게 든다.
마지막 장 - 높은 산에서, 후곡
‘기다림 – 반가움 – 나의 변함 – 다시 기다림 – 차라투스트라가 온다.’의 구성을 가지는 시. 고귀한 영혼을 기다리는 고귀한 영혼의 타락과 타락을 극복하고 다시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리는 고귀한 영혼. 우리나라 유명 사찰의 벽화에 등장하는 깨달음(소)을 얻어가는 동자승을 그린 심우도(십우도)의 변주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