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지 않은 책에서 칸딘스키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다. ‘내적 필연성’ – 내적 필연성은 회화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이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 문학, 소설, 무용 등 모든 장르의 예술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내적 필연성은 각 예술의 언어가 가지는 합목적성으로 마치 예술 언어들의 법칙성과 같은 것이다. (마치 칸트의 철학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 내적 필연성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개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집단의 차원에서는 시대정신과 화합해야 하며, 예술 본연(절대적인 미)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칸딘스키는 진정한 예술적 성취는 예술 본연에서 추출되는 내적 필연성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회화에서 내적 필연성은 형과 색에 대한 문제인데, 각각의 형태가 가지는 울림과 각각의 색이 가지는 울림이 중요하다. 또 더 나아가 색과 형태가 복합적으로 사용될 때는, 어우러져서 내는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색의 공명이 관람자에게 명확히 전달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구체적으로 회화 언어인 형태와 색을 분석하고 있다. 이것이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의 주요 내용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미학, 미술사의 언저리를 배회하기 시작하고부터 이니, 근 1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동안 미술 관련 서적을 읽을 때면 칸딘스키의 이 책이 자주 인용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회화가 서사로부터 독립하고, 자연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하는 후기 인상파 즈음하여, 화화는 너무나 풍성하게, 또 급진적으로 변해간다. 화가들에게는 자신의 개성과 감정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았고, 대상은 해체되고(다시 구축되기도 하고), 색은 점점 원색으로 강렬해졌다. 칸딘스키 역시 이 시기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작업에 이론적 배경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그들의 작업을 옹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칸딘스키는 이 책을 구상했는지 모르겠다.
그 시기에 칸딘스키의 목적은 적절한 것 같다. 사실 그 시기부터, 자연 모방(대상의 묘사)으로부터 멀어지고, 작가의 개성이 강화되고, 강조점이 다른 다양한 OO주의, OO파들이 생겨나면서 일반인에게 너무나 어려운 것으로 변해갔다. 과거 직관에 의하여, 이해하거나 감동받던 그림이 이제는 해설을 들어도 도통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서 칸딘스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의 작업을 이론적으로 지지하는 근거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미술사적으로 성공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정치적으로 칸딘스키는 실패한 것인지 모르겠다. 왜냐면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화가들의 테크닉과 함께 후광으로 드리워져 있던 신비주의의 외투를 벗겨버렸다. 어떻게 보면 천기누설을 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가면 쓴 마술사가 자기 마술의 비밀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화가들의 영업비밀(?)을 대중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낸 듯하다.
한편, 그의 미학에 대한 주장은 당대의 철학적인 성취에 비하면 아주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고, 어쩌면 신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정적으로 칸딘스키가 말하는 내적인 울림(개성)이라는 것이 막연하고, 매우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술사나 미학에 관련한 책을 보다 보면, 우리는 화가 개개인이 마치 엄청난 철학자 같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미학 책이나, 미술사에 언급되는 화가들은 엄청난 이론적인 기반 위에서 창작을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사실 이것은 미술 언저리에 있는 비평가들의 공이다) 그런데 칸딘스키의 이 책을 읽으면서 ‘겨우 이 정도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칸딘스키는 내가 가지고 있던 미술가에 대한 철학자 같은 경외와 환상을 ‘환쟁이’ 정도로 바꿔 놓았다. 이런 느낌 때문에 신비주의가 걷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오늘의 관념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입장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1910년에는 충분히 앞선, 명료한 이론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매우 회화적인 ‘칸딘스키의 글쓰기’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그의 ‘회화적 글쓰기’는 책의 초반에 나오는 움직이는 예각 삼각형의 비유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데, 그의 글쓰기는 매우 이미지 적이다. 내용의 전개가 매우 화화적이다. 마치 그림책,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이 책 중간에 부록으로 놓은 칸딘스키가 지은 산문시에서 악기에 대한 묘사는 음악을 색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의 시는 마치 그림처럼 보인다. 역시, 화가의 시답다! 그는 뼛속까지 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