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위대한 개츠비]F.스콧 피츠제럴드

by YT

소설에는 몇 가지 이야기의 복선을 위한 장치들이 있기 마련인데,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몇 가지 장치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T.J. 에클버그 박사의 안과 광고판’이다. 이 광고판은 두 눈이 매우 큰 광고 판으로 그 앞을 오며 가는 사람들의 감정과 다툼, 혼란과 욕망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하느님’ 같은 존재로 보인다. (윌슨은 실제로 이 광고판의 시선을 하느님은 모두 알고 있다는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중요한 사건을 내려다보는 쓰레기 산의 두 눈 광고판은 아마도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매우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재미있는 것은 하느님의 눈과 같은 전지적 시선이 자본주의의 첨병인 광고판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정의의 수호자일 것 같은 신은 바로 경제와 돈이 된다. 그래서 이 광고판이 더 슬픈 것이다. 광고 판의 시선은 ‘무엇이든 알고 있고, 그것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정의의 신’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물질 숭배와 부에 의한 지배를 나타내는 매우 ‘속물적인 신’이 된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224페이지)


나는 소설 속 인물인 닉이 개츠비에게 한 이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의미에서 The Great Gatsby는 반어적인 표현이다. 소설적 개츠비는 전혀 Great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지 앞에서 긴장하고, 흥분을 통제하지 못하고, 때로는 자신을 책망하고…, 너무도 순수한 연애 초보의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지독한 사랑꾼이다. 오직 데이지만 바라보고, 데이지만 염려하고, 데이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세상을 사는 사람, 그는 순수함의 결정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순수는 데이지와 그의 남편에 의하여 조롱당하고, 교묘하게 파국을 맞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은 현대와 조우한다. 철두철미하게 돈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욕망은 돈과 결합하여 조금의 인간다움도 용납하지 않는 빽빽한(꼼짝달싹 못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버린다. 이 속에서 정직함, 배려, 정의와 같은 ‘순수’는 조롱당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책에서 배우는 순수의 절대 가치는 지키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된다. 현재 한국의 정치가 그러하고, 주식과 부동산을 둘러싼 모습이 그러하다. 피츠제럴드는 이런 순수의 가치가 조롱당하는 초창기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 역시, 순수한 것에 대한 조롱과 그래도 굴러가는 자본주의의 수레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262 페이지, 마지막 문장)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낙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