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책은 제목의 성공적인 번역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제는 [Wuthering Heights]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저택의 이름이다. 그리고 ‘워더링’이라는 말은 바람이 거세다는 의미의 심지어 잉글랜드 북부 지방의 사투리다. 영어 제목으로는 건조하고, 밍밍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거의 새로 만들어진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은 얼마나 풍부한 느낌을 전달하고, 이야기의 격정을 제대로 표현한 말인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고, 폭풍 같은 한바탕 광풍이 몰아칠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이 책을 쓰고 1년 후에 죽었다. 그럴 만하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한동안 그 이야기에 빠져 산다는 것이고, 소설 속의 인물들은 바로 작가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너무나 아프고, 짐승처럼 할퀴고, 노예처럼 얻어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격정으로 끝없는 눈물이 흐르는 그런 소설이다. 독자로서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아리고, 몸이 아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고,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도 소설의 아우라에서 벋어 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을 쓴 사람은 어떠했겠는가? 당연히 오랫동안 소설의 아우라에서 벋어 나지 못했을 것이고, 이야기는 그녀의 몸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나는 엘 그레코의 그림과 에곤 쉴레를 떠올렸다. (뒷부분에 추가된 작품 해설에서 서머셋 몸도 엘 그레코의 특정 그림을 떠올렸다고 한다) 엘 그레코는 주로 예수와 천사와 마리아가 등장하는 성화를 주로 그렸지만, 위와 아래로 나뉘는 그만의 구도와 인물의 기다란 각진 변형을 특징으로 하는데 전반적으로 성화임에도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이런 회화의 느낌이 [폭풍의 언덕]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엘 그레코의 상하 구도는 마치 히스클리프가 믿는 유령의 존재와 계속 그의 마음을 잡고 흔드는 캐서린의 존재 구도와 비슷하고, 계속해서 불러내는 신에 대한 이야기와 맹세 등은 엘 그레코 회화의 주제와 닮아있다. 그리고 엘 그레코의 각진 인물과 염원하는 듯한 제스처는 세상의 고난과 처절한 번뇌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히스클리프와 두 명의 캐서린, 힌들리의 번민과 고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또 하나, 에곤 쉴레. 그의 사랑하는 연인, 발리를 떠나보내고 다른 중산층의 여인과 현실적인 결혼을 선택하는 그의 심리와 행동은 엄마 캐서린과 유사하고, 그의 유약한 이미지와 병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린튼 히스클리프’를 닮았다. 에곤 쉴레의 삶 자체에는 [폭풍의 언덕] 주인공들을 버무려 놓은 듯한 광적이고, 짐승 같은 성격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많이 그렸던 자화상과 발리의 초상화, 발리와 쉴레가 등장하는 2인 인물화는 괴기스럽고, 광적이어서 소설 속의 느낌들과 너무나 일치한다. 에곤 쉴레의 그림에서 보이는 발리의 나른하고, 도발적인 눈빛과 광기에 찬 눈은, 아마도 두 캐서린의 눈빛과 닮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반항적인 모습과 격정은 히스클리프의 눈빛을 닮았을 것이다. 엘 그레코와 에골쉴레의 회화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읽었던 [폭풍의 언덕]의 느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원시성’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것은 미술 사조에서 정리되고 차분한 고갱의 원시성이 아니라 에곤 쉴레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표현주의적 원시성이다.
엄마 캐서린에게 당시의 상식, 도덕과 관습은 없다. 그녀는 히스클리프와 에드가 린튼의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려 한다. 둘 다 사랑하는데 무엇인 문제냐는 것이 그녀의 태도다. 물질적인 복수와 정신적, 신체적인 학대를 일삼는 광기에 젖은 히스클리프지만, 캐서린에게만큼은 살아서도 또 죽어서도 진심이었다.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맹수의 사랑과 같은 것이 히스클리프의 사랑이다. 덩치가 크고, 건강하지만 캐서린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고, 캐서린을 닮은 헤어튼을 보며 괴로워하고, 헤어튼과 딸 캐서린의 모습에서 자신과 엄마 캐서린을 떠올리는 한없이 나약한, 맹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매우 동물적인 순수한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원시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물적인 사랑은 헤어튼과 딸 캐서린의 알콩달콩한 사랑으로 정화되어 다시 격식이 있고, 도덕이 있는 일반적인 인간의 사랑으로 돌아온다. 폭풍은 히스클리프와 함께 만들어지고, 히스클리프의 죽음과 함께 그치는 것이다.
[폭풍의 언덕]을 읽는 초반, 어떻게 엄마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에피소드가 부족한데, 그 부분은 뒤에 딸 캐서린과 린튼 히스클리프가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에 그 해답이 있다. 그것은 일정 정도 상처 받은 동물을 간호하는 모성 같은 사랑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에밀리 브론테의 탁월한 구도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부족했던 이유는 세월을 뛰어넘어 그들의 자식 대에 설명되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와 엄마 캐서린의 사랑은 정말 제목처럼 ‘폭풍’ 같다. 폭풍의 특징은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는 것인데,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에드가 린튼과 이사벨라 남매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폭풍과 같은 사랑에 철저하게 희생된다. 모든 것을 휩쓸며 지나가던 폭풍은 딸 캐서린과 헤어튼에 와서 비로소 잠잠해지게 된다.
절벽에 핀 히스 꽃 – 히스클리프.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잉글랜드 북부 지방은 히스가 많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각 장의 도입부, 그들이 이동을 할 때, 야외 장면에서는 이 히스 꽃이 늘 등장한다. 히스는 거센 폭풍을 견뎌내는 우리로서는 ‘잡초’ 같은 이미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바로 이 강인하고, 꿋꿋이 버티는 히스 꽃이 히스클리프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이 히스 꽃은 절벽에 피어 있다. 그래서 더욱 위태롭고, 광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