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문자의 시대’도 저물어가는 느낌이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 인류는 ‘말의 시대’를 살았다. 말의 가장 큰 문제는 휘발성이었고, 문자는 말의 단점을 극복하고 ‘저장성’을 확보함으로써, 인류는 문자에 의한 지식의 집적과 전승을 이룰 수 있었고, 역사와 문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문자는 이런 집적과 전승의 역할을 잃어가고, 스마트 폰 세상에서, (과거 말이 담당했던 것처럼) 일상의 소소한 대화를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럼 이제 인류를 소위 ‘만물의 영장’으로 올려놓을 수 있었던 지식의 집적과 전승은 누가 담당할까? 결론적으로 ‘영상’이 그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사 과정에서 본다면, 이런 갑작스러운 주인공 교체는 매우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어릴 때 ‘TV 보지 말고 책 좀 읽어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이것은 책이 다른 미디어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를 가정한다. 시대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의 우월성을 듣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인식의 관성에 기인할 뿐, 시대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어 보인다.
책은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 TV나 라디오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인류의 여러 단면을 보유하고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당시 사회와 국가에 의하여 점유되던 영상은 양적인 한계가 분명해 보였지만, 개인 중심의 책과 그것의 출판은 다양한 분야에서 좀 더 많은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다양성 하나만으로도 책은 우월함을 향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이 혼자서 앞만 보고 외로운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영상은 영화로, 비디오로, 드라마로, 이제는 유튜브로, 넷플릭스로 폭발을 일으키며 확대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1847년 발행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현재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1920년대 만들어진 영화부터 2012년대에 만들어진 것까지 영화 장르에서만 쉽게 10편을 찾을 수 있다. 그것도 영국 버전만이 아니라 미국, 멕시코, 프랑스 심지어 한국판 [폭풍의 언덕]도 있다. 또, 히스클리프 역의 제임스 호손 버전이 있고, 톰 하디 버전, 최무룡 버전이 있다. 하나의 소설에 대응하는 영상 콘텐츠는 아마 다른 제목의 변형이나 TV 드라마까지 포함한다면, ‘폭풍의 언덕’ 영상은 전 세계적으로 아마도 백 편이 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각기 다른 버전은 각기 다른 감동과 인식을 줌으로써, 독자적인 하나의 완성품이 된다. 영상은 이제 양적인 면에서 책을 압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은 영상 제작에 대한 기술적 접근이 쉬워졌고, 책처럼(어쩌면 책 보다 더) 개인이 생산(제작)에 쉽게 뛰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시집은 도무지 팔리지 않는 것이고, 소설은 점점 뒷방으로 밀려나고, 책꽂이 대신 거대한 TV와 몇 개의 태블릿이 우리의 공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영상의 침략은 이제 전선을 확대하여, 전통적으로 책의 영역으로 알려진 에세이, 사회과학, 자연과학, 심지어 철학 분야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제 문자 콘텐츠는 역사의 뒷방에서 과거의 영광을 씹으며, 서서히 저물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