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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Nov 15. 2021

[적과 흑] 스탕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5 [적과 흑]의 표지 그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표지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1800년 작 [레카미에 부인].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좌측의 긴 등과 가운데 소파 그리고 그 위에 비스듬히 가벼운 흰색 실내 드레스 차림으로 앉아있는 레카미에 부인. 미완성 작이라는 이 그림은 매우 단순한 구성의 절제미를 느끼게 한다. 민음사의 표지 디자이너는 이 레카미에 부인을 드 레날 부인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마틸드 드 라 몰 양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일까? 등을 살짝 보인 체 정면을 응시하며 뭔가를 심연에서 갈구하는 듯한, 그림만큼 정제된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나는 감히 쥘리엥과 마지막 밤 이후, 혼자 남은 드 레날 부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그림의 작가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서양 미술사에서 변절의 대명사로 통하는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면에서 [적과 흑]에 주는 추가적인 울림이 있다. 자신의 자유주의 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귀족 사회로 상승하여 들어가는 쥘리엥의 모습이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실제와 닮아 보이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자’라는 나의 몇 년 전 결심 탓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적과 흑]을 읽을 결심을 한 것은 (또) 니체 때문이다. 니체의 저작에서 스탕달은 탁월한 심리학자로, 자유정신의 철학자로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너머를 보고, 비틀어보는 니체를 고려할 때 스탕달에 대한 무한 긍정은 내게 너무나 고무적이었다) 스탕달이 47세인 1830년에 발표된 [적과 흑]은 당대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세대가 지난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주목을 끌고, 제대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이점에서 1800년대 후반을 살았던 니체는 스탕달의 대표작인 [적과 흑]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니체가 따분한 독일성의 대안으로 프랑스에 대한 호감을 내 비칠 때, 스탕달은 볼테르와 더불어 거의 철학자의 수준으로 올라온다. 니체 철학의 탁월한 심리 분석은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옙스키뿐 아니라, 스탕달에게도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리적인 근접성과 공통 문화라는 차원에서, 스탕달의 영향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니체가 감동한 [적과 흑]의 심리묘사는 진정 탁월하다. 가난하지만 모욕을 참을 수 없는 쥘리엥은 심리적인 면에서 귀족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주변인들의 속물근성과 신학교 예비 사제들의 마키아벨리즘을 너무나 싫어하지만, 그의 천재성이 자극하는 특출남으로 점점 사회의 상층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상승 에너지를 쌓아가고 그것은 마침내 최고의 귀족 마틸드의 남편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 스스로를 주변과 격리시키는 고독을 스스로 배양하는데,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고독’과 매우 흡사하다. 쥘리엥의 상승 에너지(욕구)는 처음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으로 추동되는 면이 있다. 드 레날 부인에게 느낀 사랑은 드 레날 씨의 모욕에 대한 반작용 측면이 있었고, 마틸드에 대한 집요한 공략은 그녀가 쥘리엥에게 가하는 일종의 모욕(자존심과 명예심에서 기인하는)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평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 자존심과 모욕에 대한 저항이 그의 지적 재능과 결합하면서 그를 한 단계 한 단계 위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모두들 아는 것처럼 니체는 나폴레옹을 ‘위버멘쉬’의 표본으로 여겼다. 사실 당시는 니체뿐 아니라, 베토벤도 나폴레옹을 위하여 교향곡 ‘영웅’을 작곡했고, 헤겔 역시 나폴레옹을 ‘절대정신’으로 칭했다. 스탕달 역시, 나폴레옹이 유럽에 불러일으킨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다. [적과 흑]에도 자유주의자와 왕당파(귀족과 사제들)라는 정치적인 세력이 등장한다.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자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귀족들의 자유주의자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스탕달의 주된 묘사와 비판은 권태에 휩싸인 귀족 사회와 마키아벨리즘으로 무장한 사제들에 있다. 특히 사제들의 간계와 술수는 [적과 흑]에서 구역질을 일으킬 정도다. 비록 얀세니스트를 대표하는 두 명의 사제다운 사제 셀랑과 피라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종교인에 대한 현실적인 스탕달의 비판은 니체의 종교에 대한 관점과 맞닿아있다. 스탕달이 현실의 타락한 종교를 소설로 예를 들어 비판한다면 니체는 형이상학적 종교 즉, 영혼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으로 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쥘리엥이 사랑한 두 여인(정확히는 쥘리엥을 사랑한 두 여인) – 드 레날 부인과 마틸드 드 라 몰 양 – 의 감정 변화를 포착하는 스탕달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적과 흑]의 진정한 재미는 이 두 여인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다. 드 레날 부인의 감정 변화가 마틸드 보다는 좀 더 온건하고 부드러워 보이는데, 그것은 두 여인의 나이 차이와 신분의 차이 때문이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엥을 알기 전, 수녀원 출신의 연애소설도 읽어보지 못한 순수 자체로 자신의 위험한 사랑의 변명을 고해와 신과의 관계(신의 벌)에서 찾는다. 하지만 쥘리엥의 2차 방문(파리에 가기 전 24시간)에서 포기한 듯 무너지는 감정과 감옥에 있는 쥘리엥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두를 거는 사랑의 화신 같은 형태를 보인다. 그리고 후작의 딸인 마틸드는 쥘리엥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자존심과 가문의 명예 속에서 고통스럽게 갈팡질팡하지만, 쥘리엥의 탁월한 전략으로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앞뒤 가리지 않고 던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남들의 시선과 상상에서 오는 이상적인, 환상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스탕달은 이 두 여인이 사랑에 빠지고, 괴로워하고, 자신을 던지는 심리적 변화 과정을 아주 사실적인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니체의 추천으로 시작했지만, 오래간만에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막연히 알고 있던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이 불러왔던 유럽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반동적인 귀족과 사제의 두려움과 관점을 통해 좀 더 생생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인 듯하다. 프랑스혁명은 역사적으로 벌어진 단순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의 근본을 바꾼 사건임을 알았다. 평범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사건은 쥘리엥 같은 소시민들에게 상승의 꿈을 심어 주었고, 귀족과 사제들에게는 또 다른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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