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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도스토옙스키

by YT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두 번째 읽으며 그는 글쓰기에 있어 문리가 트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세하게 묘사하며 분방하게 쓰지만 그것이 정교한 플롯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느낀다. ‘자유롭되 이치에 맞는’ 마치 소설 쓰기의 신선의 경지에 다다른 듯하다.


처음 이 책이 알렉산드르 황태자에게 헌정되었다는 글을 읽고, 곧바로 용비어천가를 떠올렸으나 사형선고의 경험(28세)과 출간(52세) 사이의 갭이 큰 것으로 보아, 옮긴이의 의견에 따라 ‘사상 전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역시 뒷부분 역자가 서술한 도스토옙스키의 생애와 [악령]과 관련한 서술에서 알았지만 [악령]은 작가 자신에 의하여 한번 (스타브로긴에 대한 강조), 또 출판업자의 의견에 의하여 한번, 두 번의 대대적인 중간 변경이 가해지면서, 다소 너절해졌다는 인상이 든다. [악령]의 주인공은 처음 작가의 의도대로 나쁜 표트르가 되어야 했다. 스타브로긴의 애매함은 소설 전체를 정말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무정부주의적 미래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는 사람 치고는 아무 생각 없는 멍한 바람둥이에 불과하다. 스타브로긴의 캐릭터 묘사로 비록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잡히는 바가 없다.

역자의 글에서, 또 띠 표지의 광고 문안에서 ‘스타브로긴의 고백’ 장을 마치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대심문관’과 비교하지만 그것은 분명 과장광고 일뿐이다. 차라리 내 생각엔 ‘표트르가 자살을 종용하기 위해 키릴로프와 대화하는 장면’이 작품의 대표 章이 되어야 한다. 키릴로프의 논조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은 같은 종이의 앞 뒷면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신에 대한 깊은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키릴로프의 고민은 ‘자유의지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 그 끝에는 자살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이 자유의지의 극단을 보여주지 않는가?’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성과 자유의지의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매우 솔직한 미학적인 접근이다.

여전히 도스토옙스키의 섬세하고 탁월한 인물 캐릭터 만들기가 번쩍이긴 하지만(그의 인물은 흔하지만, 다소 복잡한 성격을 가진 매우 현실적인 다면성의 인간들이다.), 스타브로긴의 존재 때문에 그의 작업은 탈선한 느낌을 받는다.


[악령]은 세대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스테판 선생의 자신에 대한 솔직함의 발견과, 마치 악령에 쓰인 듯 폭주하는 표트르의 대비가 [악령]의 중심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요즘 우리나라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소위 운동권 출신의 아버지와 그들의 전혀 운동권적이지 않은, 보수적인 성향의 아들들과의 충돌.

스테판 선생은 세상의 경향을 반영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요즘 젊은이들의 사상으로 자신이 진정 믿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즉 스테판 선생은 ‘~인 체 하며’ 세상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위선과 가면은 표트르에 의해 철저하게 조롱당하게 된다. 결국 스테판 선생은 그의 아버지 세대들처럼 신부의 축복 속에 죽게 된다. 이것은 사상적인 전향을 이룬 작가를 상징한다.

그리고 [악령]에서 남녀 간의 사랑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스테판 선생과 바르바라 부인의 사랑은 매우 현대적이고 파괴적인, 지독한 사랑이다. 읽는 내내, 독자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는 약간은 코미디 적인 부분도 있다. 스타브로긴과 마리아의 사랑은(이걸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매우 의무적인 것으로, 윤리적 강박과 연결되어 있다. 리자베타의 스타브로긴에 대한 사랑은 갈팡질팡 허우적거리는 젊은이의 신경증적인 짝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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