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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by YT

내가 좀 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 어 등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독서의 끝에 남는다. 조어, 조합, 운율 – 내가 좀 더 이것을 이해했다면, 2배는 더 즐겁게 이 소설을 읽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창백한 불꽃]을 읽어가면서 나는 러시아가 낳은 또 다른 천재를 떠올렸다. ‘말레비치’ – 절대주의 미술, 회화를 끝 단까지 밀고 나갔던 천재. 회화와 회화 아닌 것의 경계까지 간 사람. 여기 나보코프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끝 단까지 밀고 간 천재, 근대 미술에서 회화의 평면성을 근대성으로 말하듯이, 나보코프의 작품에서는 ‘언어의 유희’가 그 중심에 있다. [창백한 불꽃]은 언어유희만으로 충분히 미적인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미술에서의 평면성과 대비시켜, 산문에서의 평면성이라 부를 수 있다. 언어유희에 대해, 이 책의 특별한 구조(머리말, 시, 주석, 색인으로 이루어진)는 소설의 미적 가치를 더한다.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을 통해 형식적 평면성 위에 소설적 서사를 더 쌓고 있다. 산문의 끝 단(언어의 유희만으로 끝나는)을 추구하면서도 탄탄한 서사(소설의 필수 요소)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더욱 천재 일지 모른다.

머리말이 있고, 창작 시가 있으며, 그 시에 대한 주석이 있고, 전체에 대한 색인까지 있는 소설. 하지만 그 각각은 전체로 모아져 멋진 소설이 된다. 읽는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갖가지 복선, 힌트와 상징을 언어의 유희로 표현하고, 독자가 잘 따라가거나, 매우 혼란스럽도록 색인과 참조를 남발하는 소설. 과연 형식적인 면에서 과연 소설일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마치 천재 익살꾼이 만든 고도로 정교한 '뱀과 사다리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소설이다. 어려운 언어유희를 따라가다가도, 폐왕의 탈출 이야기와 시해 음모에서는 스릴러 영화같은 박진감이 있고, 주석자의 시인에 대한 병적인 침착이 있고, 또 그 부인과의 불화도 있다. 분명한 서사 구조, 이야기를 가지는 분명한 소설인 것이다. 이야기 속 이야기의 왕이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이 책의 화자였고, 관련이 없을 것 같던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와 합해지는 지점, 두물머리가 있다. 간단한 주석 같지만 모든 것이 의도로 짜진 게임 판 같다. 매우 디테일하며, 거대한 스토리를 짜는 사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직조의 왕거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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