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의 그림 표지와 함께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 간의 충돌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모든 비평과 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의 코멘트 역시 세대 간의 갈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소설이 세대 간의 갈등을 일부 담고 있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연애/심리 소설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원제목은 ‘아버지들과 아들들’로 투르게네프는 보다 가치중립적인 현상 및 사태에 대한 묘사를 의도한 듯 보인다. 즉 ‘등장하는 세명의 아버지(큰아버지 파벨 포함)와 두 명의 아들에 대한 상황, 갈등, 사랑, 그리고 감정의 묘사’를 담백하게 평행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오고 그동안의 투르게네프의 문학 및 사회 경력과 결부되어 논쟁은 ‘대 변화의 시기에 일어나는 세대 간 갈등’에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소설은 [아버지와 아들]로 제목이 바뀌면서 좀 더 갈등을 부각했고, 홍보도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굳어진 듯하다. 나 역시, 지금 태극기 부대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세대 문제에 지극히 관심이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아들]을 주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성격 규정을 원한다면 contents 내에서의 비중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연애/심리 소설이다. 바자로프와 오딘초바의 자존심 강한 이기적인 사랑, 바자로프의 페네치카에 대한 불장난, 아르카디와 카챠의 어리숙하고 순수한 사랑, 파벨의 R공작부인에 대한 병적인 침착과 페네치카로의 투영, 그리고 그 속에서 동생과의 관계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갈등, 은근하면서 잘 눈에 띄지 않는 니콜라이의 페네치카에 대한 사랑, 아르카디와 바자로프의 오딘초바에 대한 호기심 등이 있고, 바자로프와 바자로프의 부모 간의 이상한 관계, 바자로프 부모님들의 아들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사랑, 니콜라이의 아르카디에 대한 부정 등, 연애/심리 소설로 [아버지와 아들]은 보아야 한다. 연애 심리적인 문제가 세대 간의 갈등보다 더 많이 다루어지고, 주류를 이루며 전반적으로 서사를 압도하기에 나는 감히 [아버지와 아들]은 연애/심리 소설이라고 읽고 싶다.
그리고 바자로프! 1800년대 중반을 사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 아주 싸가지 없는 개 쓰레기 같은 인물. 이성과 감정이 따로 노는 인물. [아버지와 아들]은 소설의 시작 전에 ‘벨린스키의 추억에 바친다’라고 쓰고 있는데, 내 생각에 바자로프의 모습이 벨린스키의 모습이라면 아마도 투르게네프는 벨린스키와는 애증의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르게네프 자신의 투영으로 보이는 아르카디는 온건한 지식인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틀 안에서 움직이는 지극히 평범한 귀족이다. 아르카디는 투르게네프의 실제보다 평범하고, 겸손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싶다. 농노를 스스로 해방하고, 바쿠닌, 케르첸과 어울렸던 투르게네프는 충분히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이라고 할만한데도 말이다.
‘바자로프’는 아직 명확한 실천의 방향을 정립하지는 못했지만, 니힐리스트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의 관점을 다소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권위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보다 확실한 과학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너무나 어리고 미숙한 모습을 드러낸다. 부모님이 매우 불편해하는 자식, 주인이 손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페네치카에게 키스를 시도할 때와 같은 뻔뻔스러움, 친구인 아르카디를 아주 무시하는 태도 등은 바자로프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서사들이다. 러시아의 1850년대는 이런 지식인들의 행동이 진보로 너그러이 보일 수 있는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 내게 바자로프의 모습은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바자로프와 대립 각을 이루는 파벨의 모습에 마음이 더 끌리는 편이다. 러시아 말기 귀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혹 결투로 숨진 러시아 낭만파의 거장 푸쉬킨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R공작부인과의 지독한 사랑과 페네치카에 대한 스토킹, 하지만 내면의 갈등. 동생을 지켜주고 싶은 결투의 제안, 자기 스스로 만든(혹은 기존의) 틀 속에서 진보적이며, 관대한 아량을 베푸는 모습이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은 니콜라이와 아르카디가 되어야 한다. 파벨로 대표되는 귀족주의와 바자로프로 대표되는 급진주의의 대림 속에서 적당한 중간에서 타협하고, 포기하고, 또 상대를 이해하려는 니콜라이와 아르카디는 진정한 역사의 승리자 일지 모른다.
문학동네 판에서의 번역을 언급하고 싶다. 다소 적극적인 번역을 편 듯한데, 다소 많이 가지 않았나 싶다가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적절한 번역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는 ‘웡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러시아 단어를 프랑스 스타일로 발음할 때의 느낌을 프랑스어 어감을 살려 ‘웡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말한 것이 아니므로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러시아어 발음을 프랑스 스타일로 표현하는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런 경우 의미 전달이 다소 약할 수 있겠다는 고민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웡칙’은 매우 잘된 적극적인 번역의 사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