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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외로움

by YT

집에 왔을 때, 내가 내는 소리만 난다는 것이 사람을 외롭게 한다. 나는 내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에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며칠 전부터 파리와 동거를 시작했다. 정확하게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내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암튼 좁은 방에 새 식구를 맞았다. 방을 들어올 때면 가끔 그에게 안부를 묻곤 한다.

추석 전날 골프 연습장의 250야드 깃발 위의 황금빛 보름달과 추석날 승마 펜스 너머에 뜬 형광 빛 노란 달이 예쁘다. 서울의 달이나 두바이의 달이나 똑같다는 것이 새삼 낯설다.

파리와 동거 전후쯤 일거다. 좋아하는 아랍 노래가 생겼다. 레바논에서 무작정 “레바논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CD 주세요!”라고 말하며 구입한 하이파(가수 이름)의 CD 중 3번째 곡 매우 의욕적 이게도 이 노래를 외워서 불러볼까 생각 중이다. 우리나라 리듬과 약간 비슷한 구석이 있는 빠른 곡(파리야! 너도 알다시피.., 난 원래 빠른 춤곡을 좋아한다.) 자동차 유리창에 금이 갈 정도로 볼륨을 키우고, 허리 아래에서 전율하는 일정한 간격의 베이스 북소리에 맞추어 열불 나는 두바이의 고속도로를 달린다. 누가 알아봐 달라고…, 정국장 집에서 얻어온 사과를 깎았다. 한 번에 동그랗게 깍지 않고, 손님 줄 때처럼 8 등분해서 씨가 있는 핵을 도려내고, 접시에 담아서 포크로 찍어 먹었다. 조금 덜 외롭다.

외로운 백수는 파리를 잡을 때 덫을 놓는다. 보통 사람 같으면 파리채나 파리채의 대용물을 이용하겠지만 백수는 덫을 놓고 파리를 기다린다. 언제부턴가 내가 통 신경을 못쓰는 사이 나의 동거 파리는 친구를 내방으로 끌어들였다. 약간의 배신감을 경험하고 드디어 파리와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구상해 낸 것이 스피니 슈퍼마켓의 초코 크로와상을 담아주는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다. 다 먹은 박스 안의 크로와상 부스러기가 좋은 유인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여기에 약간의 오렌지 주스 방울을 떨어트려 완벽한 미끼를 만들었다. 그리고 입구는 조그만 지우개로 지탱해 두고 이 파리 연놈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TV에 잠깐 한눈을 파는 동안 역시나 이 연놈은 투명한 사각의 덫에서 기분 좋게 포식하고 있었다. 볼펜을 이용해 지우개를 바깥으로 쳐내자 날카로운 단면의 입구는 찌그러지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생포 성공, 난 이 연놈을 산채로 아파트 가비지 통 안으로 던져 버렸다. 안녕! 파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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