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나의 최근 프로젝트 ‘사놓고 읽지 않은 책 읽기’. 아마 경향신문사 빌딩에서 ‘소설 창작반’ 강의를 들었을 때,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어, 또 죽은 사람들이 다시 등장한다는 선생님의 파편적인 칭찬에 감응하여 이 책을 구입했었다. 당시에는 강의를 따라가기 위해 읽어야 했던 소설과 시가 많았기에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보지는 못했고, 7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책장을 꾸미던 장식의 지위에서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구원할 수 있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는 느낌이었다. 남미의 근현대사가 제국주의의 수탈이라는 측면에서, 일제에 의한 우리나라의 수탈과 닮았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삶이 염상진과 김범우의 삶과 닮았고, 바나나 농장에서의 사건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논밭에 대한 수탈과 미군정의 학살과 닮아있다. 또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였던 우르슬라는 꼿꼿한 자기 확신과, 현실에 대한 열정을 담고 인내하며 견뎌왔던 우리 엄마와 할머니를 그대로 묘사한 듯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비록 우리와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땅 속을 통해 그 울음과 떨림을 공유하는 감응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에 남미와 우리는 전혀 반대의 공간에서, 전혀 다른 생활의 환경에서 비슷한 정서적 감응을 나누며 살았는지 모른다.
위의 측면에서 나는 다시 한번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의 연작이 얼마나 위대한 우리의 자산인지 알 것 같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며, 전 세계 평단에서 새로운 소설 언어로 극찬을 받았지만, 조정래의 3년작 역시 그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문화적 제국주의는 과거 그들의 정치 경제적 제국주의를 희석하기 위하여,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국주의는 문화를 첨병으로, 美를 새롭게 정의하면서, 과거 자신들의 추함을 사죄받고자 하고, 자신들의 폭압을 용서받으려 하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미술에 있어서 남미 작가들의 글로벌 시장에서의 호평은 이미 1982년 소설 영역에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통해 기획되었던 것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며 나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연필로 줄을 그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어떤 고독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로감이다. 관계 및 상황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갖게 되는 피로감을 마르케스는 ‘고독’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말년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고독이 그러하고, 죽은 후 멜키아데스의 고독이 그러한 것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번잡함과 난잡함의 용광로에서 자의든, 타의든 빠져나오게 되고, 그 빠져나오는 순간 그들은 고독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죽는 날까지 열정적이었던 우르슬라만 그 고독을 피할 수 있었다. 고독은 치열함/번잡함에서 물러난 뒷방 사람들의 고독이고, 번잡함에 대한 거리감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정신 이상으로 나타나거나,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격리로 나타나더라도, 고독은 삶에 거리를 두는 적극적인 행위인지 모른다.
마술적 리얼리즘! 이 단어를 나는 미술에서의 원시성의 부활로 이해하고 싶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원시성을 미술의 영역에 영접했듯이 마르케스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이 원시성을 부활했다. 이 원시성이 미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주류로 등장하게 된 계기가 마르케스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마르케스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이 원시성을 마르케스는 성적인 부분으로 많은 부분 풀고 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마치 동물과 같은 원시성을 인간관계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레메디오스의 승천, 구더기, 뱀 인간 등은 우리의 꿈과 상상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들인데, 이 부분 때문에 평단은 원시성이라는 단어 대신 마술적이라는 표현을 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