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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Aug 05. 2022

서사

색(色)과 형(形)은 회화의 고유 언어다. 하지만 회화가 오랜 기간 문학의 지배를 받음에 따라 색과 형은 서사에 비해 상대적인 차별을 받아왔다. 서사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서 색과 형은 서사의 아들, 즉 의미(혹은 교훈)를 드러내기 위한 부차적인 존재로 머물렀다.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의 별난 시선과 사진의 등장으로 ‘재현으로서의 회화’는 회화가 그동안 의지했던 서사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렇게 익어가는 독립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화가들은 그들만의 언어에 주목했고, 마침내 색과 형은 마티스에 의하여, 추상주의 작가들에 의하여 그 고유의 창작 언어로 점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물론 서사의 끈덕짐은 쉽게 떨칠 수 없는 것이기에 요즘도 망령처럼 몇몇 미술 사조를 흔들어 놓기도 하지만, 이제는 회화의 주도권은 색과 형에 있으며 문학적 서사는 상대적으로 뒷방으로 밀린 느낌이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요즘의 회화가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는 것은 여전히 일반인들은 회화를 서사로 읽으려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익숙하지만, 음악 역시 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음악의 언어(리듬, 가락, 화성) 역시 문학적 서사의 지배 아래 놓여있다. 음악의 3요소는 어떤 스토리를 묘사하기 위하여 존재해왔다. 오페라와 뮤지컬 장르는 소설 그 자체로 다만 이야기에 감각의 풍성함을 더해주기 위한 형식에 불과하다. 기악곡들에 붙는 부제(꿈의 제전, 영웅, 전원 등)는 서사의 강박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최근에 앙드레 카프레의 [Conte Fantastique]를 감상한 적이 있다. 이 곡은 에드가 알렌 포의 소설 [The Masque of the Red Death]에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고 한다. 연주 현장에서는 이 소설의 요약본을 들려준 후,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간다. 이 곡은 페스트로 인해 폐쇄된 성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가면무도회의 흥겨움,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시계 소리, 긴박하게 조여 오는 파국의 분위기를 빠르고, 어쩌면 불협화음으로도 들리는 음들로 표현한다. 이 곡의 연주 내내 나는 마치 공포의 방에서 죽음에 쫓기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곡은 철저히 서사적이다.

서사를 드러내는 화화의 방식은 요소들의 배치에 근거한다. 각 요소는 재현의 차원을 넘어, 문학과 비슷하게 은유 혹은 환유 등으로 표현되어 의미를 전달한다. 이런 요소들의 배치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의도한 의미는 보는 이들에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회화 속 기표의 연결은 철저하게 해석자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회화의 공간적인 서사 방식과는 달리 음악은 시간적인 서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음악에서의 서사는 회화의 그것보다 훨씬 뭉툭하다. 회화는 회화 속 요소의 은유를 통해 서사를 이끌지만, 음악의 요소는 분명하고 날카로운 서사의 흐름을 만들 수 없다. 음악에서의 서사는 오직 분위기에 의하여 전달될 뿐이다. 나폴레옹의 개선은 장엄하고, 활기찬 악기들의 화음으로, 파국을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는 하프의 저음으로 표현되며, 죽음에 쫓기는 주인공의 심리는 찢어지는 바이올린 소리로 묘사될 뿐이다. 음악의 서사 구조를 읽어내는 것 역시 청중의 몫이지만 이때 청중은 그 분위기만을 참고할 뿐 상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소설로 치면 음악은 이야기의 줄거리가 제거된 체, 상황과 분위기만으로 묘사된 매우 전위적인 소설 양식과 비슷하다. 나에게 음악이 전달하는 분위기의 서사는 다양한 색 면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증폭과 비슷하다.

비록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화화처럼 음악 역시 문학으로부터 이미 독립을 챙 취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욕망은 마치 본능처럼 끈질기게 시간을 타고 넘어오고, 지금도 문학을 넘어, 회화를 넘어, 음악을 넘어 존재하려 한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으로 경영과 마케팅의 영역으로 넘어오고 있다. 이쯤 되면 서사는 눈이 빠지고, 다리가 잘려도 기어서 주인공을 따라오는 터미네이터 같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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