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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Sep 07. 2022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130페이지 마지막 단락과 나의 생각

작은 레고 조각이나 더 작은 픽셀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그 대단한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실제 우리 인간 세상과 차이가 없다. 형태만 약간 다를 뿐 모든 구성물은 각각의 위치를 분명하게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재현이다. 만약 이 픽셀 모델을 감정과 에너지 등을 포함하는 연결의 관계로 본다면 모든 구성원들의 원자는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픽셀은 각각의 구성원을 모두 포함하는 덩어리가 될 것이고 빈 공간은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방향성을 가진 누군가의 감정과 욕망은 파동을 만들고 그 덩어리의 모든 구성원에게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한, 꿈틀거리는 픽셀로 이루어진 덩어리 속에서 인간은 숨을 쉬고, 서로의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이런 덩어리 세상에서 기억 상실은 연결된 모든 고리가 끊어진 경우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주인공은 끊어진 연결을 더듬고 붙들어 연결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선택한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도 연결된다. 그를 그답게 하는 그만의 고유한 것으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주인공의 여정처럼 그를 그답게 하는 것은 그가 맺었던 과거의 관계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은 타인에 의하여 다시 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 상실자에게 정체성은 허공을 떠도는 파동들의 연결이다. 주인공은 과거의 파동을 하나하나 찾아간다. 처음에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가는 줄에 의지하지만, 점점 그 주파수의 신호는 분명하게 그에게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파동이 그의 몸을 통과할 때면 그 자리에서 떨림이나 서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때는 익숙했을 장면이나, 경치, 감정에서 오는 떨림은 작은 단초가 되어 그를 계속 과거의 기억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어두운 상정들의 거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담박하다 못해, 끊어져 버릴 것 같은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문체다. 과연 한글 번역본이 얼마나 오롯이 불어의 주는 문체의 느낌을 담아내고 있을까는 별개의 문제다. 문체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정제된 감정과 사실 위주의 담백한 문체는 가늘게 연결된 파동의 온도를 낮추어 서늘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의 문체에 온기는 없다. 그 서늘함은 굳이 찾아 나선 나의 정체, 정체성조차 금방 부서질 듯 위태롭게 바스러뜨릴지 모른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바스러질 것 같은 정체성과 기억에 대한 기록이다. 독서 내내 나는 어떤 위태로운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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