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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Sep 24. 2022

[바닷가에서] 압둘라자크 구르나

 널리 알려진 대로, 나 역시 ‘난민’이라는 화두를 들고 독서에 임했다. 사실 난민 문제는 그 당시를 벋어 나면 차별, 인종, 계급, 빈부격차의 문제로 사회 문제화된다.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바닷가에서]는 앞부분, 즉 난민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래서 소설은 두 집안의 악연으로 인해 빚어지는 개인의 고통을 주로 다루고, 그것은 (간략히 진술되는) 사회 문제와 결합되면서 개인의 ‘난민’ 상황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바닷가에서]는 난민이라는 사회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개인의 역사와 관계된 지극히 개인사적인 영역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난민의 문제는 과거와 기억에 대한 개인의 진술을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액자(현재 이야기)에서 조금 다루어지는 듯할 뿐이다.

 나는 소설에서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도 반복되며, 어떤 경우는 ‘억압’의 대비로써 드러나기도 하며, 현재의 이야기에서는 지배적인 감정으로 커져가는 ‘체념’에 주목한다. 주인공들(살레 오마르와 라티프)의 자기 이야기에서 저항과 긍정의 느낌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둘 모두는 어둠에 숨으려 하고, 생각에 빠져들고, 종교에 침잠하려 한다. 둘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는 기억의 압착 과정에서 빠져나오는 증기와 같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주인공을 둘러싼 체념의 감정은 소설의 주조를 이룬다.

 체념의 감정은 현재의 이야기 속에서는 ‘난민’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역자의 해설에서 구르나는 난민의 상황을 ‘디아스포라’가 아닌 ‘Displacement’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Displacement는 Diaspora보다 더 현재/이동한 곳에 대한 긍정을 담고 있다.(나에게 Diaspora는 떠돌지만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다. 아마 근대와 현대 유대인의 시오니즘의 영향일 것이다.) 나이 먹어 낯선 곳에 ‘재배치’된다는 것, 새로운 곳에 산다는 것은 많은 부분 체념의 상황을 동반한다. 언어적인 어려움을 떠나서, 문화적인 생활방식의 차이는 아무리 옆 국가라고 해도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다. 그 적응의 과정에서 난민들은 일정 부분을 양보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체념이 느껴지는 것은 구르나 자신이 난민으로서 영국에 사는 작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체념의 감정은 역자의 표현대로 maybe, in any way, in case라는 표현, 즉 불확정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 구르나의 문체에서도 드러난다.(역자의 작품 해설) 난민은 yes or no를 말할 수 없다. 소설의 앞부분에 중심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prefer not to do~’라고 말하는 편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은(체념의 느낌) 이슬람의 생활방식에서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소설에는 살레 오마르와 라티프 외, 다른 곳에서 온 난민이 등장한다. 라티프의 펜팔 친구 얀의 조상은 집시에 그 연원을 두고 있고, 난민 보호기관의 레이철은 유대인이다. 이들은 오래전에 독일과 영국에 정착했다. 구르나는 난민의 범주를 유대인과 집시를 끌어들여 확장을 시도한다. 아마 구르나는 궁극적으로 이들을 난민의 범주로 끌어들이면서 이해를 바라고 동료의식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비록 과거에는 난민이었지만, 현재는 또 다른 난민의 강력한 박해자로 변질된 이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것 역시 어느 정도 ‘체념’에서 오는 해결책, 난민으로서의 차별과 부당함을 어느 정도 개선하고 싶은 구르나의 희망이 담겨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것은 난민으로 들어와 영국에 Displacement 되며 오랜 기간 살고 있는 구르나의 한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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