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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Sep 30. 2022

[카사블랑카에서의 1년] 타히르 샤

어느 순간 갑은 을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고, 을은 갑의 정신에 군림한다. 어쩌면 가스 라이팅을 연상시키는 이런 상황은 외국인이 처음 중동에 살게 될 때 벌어지는 일반적인 상황과 유사하다. 이것은 소설에서 타히르 샤가 비서와 관리인들에게 느끼는 감정이고, 모로코는 아니지만 나 역시 중동에서 주재하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마주했었다. 현지인들은 넋을 놓고 있고, 나만 스트레스로 안절부절못하는 상황, 이 상황은 현지인에 의해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해된다. 모든 것을 인간관계로 풀어내는 중동에서 피상적인 프로세스와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인적 네트워크에 갑자기 떨어진 외국인은 고립된다.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집수리조차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타히르 샤는 현지인 우두머리를 세운다. 카말이라는 비서를 통해 집수리를 완성해가는 1년의 시간을 그린 것이 이 소설, [카사블랑카에서의 1년]이다.

 카말이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지만, 그래도 타히르 샤는 올바른 프로세스를 만든 것이다. 만약 No.2 카말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카사블랑카에서의 1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지인 우두머리를 통한 현지인들의 통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에 구사했던 전략과 닮아 있고, 친일파를 앞세우던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 상황과 유사하다. 이러한 以夷制夷와 유사한 전략은 글로벌 회사의 해외시장 진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쩌면 이러한 대리통치의 방식은 다른 문화권에 갑자기 들어온 국가, 회사, 이주자들의 필수적인 전략처럼 느껴진다. 내가 경험한 한 적어도 중동과 이슬람 권에서는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초창기에는 적합하지만,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에 간접통제는 직접 통제를 늘려가는 쪽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도 나오는데, 인맥에 중심을 둔 체계는 필연적으로 부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카말의 경우처럼, 집수리를 진행하는 모든 부분 부분을 구성하는 사람은 카말의 친척이거나, 친구이거나, 아버지의 사촌이거나, 자신이 과거에 부리던 인부들이다. 인맥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있다. 집은 카말의 인맥으로 연결되고, 카말은 점점 거대한 괴물이 되어가고, 갑과 을의 위치 바꿈은 고착화되고, 어느 순간 타히르 샤는 뒷방으로 밀리고, 관리인들의 말처럼 집은 카말에 의해 빼앗기게 될 것이다. 즉, 눈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소설에서 현지인들(특히 관리인들)과 타히르 샤의 긴장관계를 일으키는 중요 소재는 ‘낀다샤’라는 악령, JINN이다.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지니’와 유사한 정령이다. 하지만 이 낀다샤의 활동 공간이 특정 집이라는 면에서 ‘신과 함께’에서 마동석이 연기한 성주신에 가깝다. 낀다샤와 집안의 식구들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공생의 관계이고, 항상 이 JINN이 평안하도록 인간은 모든 힘을 써야 한다. 작가는 이 모로코의 토템을 소재로 소설의 중요한 스토리를 끌고 간다. 하지만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낀다샤는 퇴마사들의 한바탕 난장을 통해 축출된다. 이런 일련의 스토리에서 볼 때 모로코인들의 JINN, 낀다샤는 단순한 부정을 대표하는 듯 보인다. 소설 속 ‘바라카’(축복)로 대표되는 긍정은 낀다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이 우리의 토템과는 다르게 보이는데, 우리의 토템에서 성주신, 조왕신(부뚜막의 신), 측신(화장실)은 절대 인간의 행위로 벋어 날 수 없는,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신으로 부정과 긍정을 모두 포괄한다. 하지만 모로코의 토템에서 긍정과 부정은 다른 주체에 의해 분리되어 있고, 어떤 세력이 더 센가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염려하는 것은 마치 이러한 토템이, 그 배경이 이슬라믹 모로코이기에 마치 이슬람의 원시성, 토템적 성격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다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나의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지만, 작가의 신분과 성장과정을 살펴볼 때, 혹시 이슬람에 대한 원시성을 강조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소설 속 토템은 이슬람과 관계없는 것이다. 토템은 사회발전 과정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나의 어머니는 1년에 한 번 꼭 부뚜막에 정화수를 올리고 조왕신께 안녕을 빌었다. 특별한 퇴마 의식이 없어도 조왕신은 우리 사회가 현대화되어감에 따라 그 지배력을 잃고, 뒷방으로 밀려나 자연스럽게 잊히고 있다. 이렇듯 무자비한 시간은 매우 탁월한 퇴마사다. 모로코 역시 시간의 퇴마사가 작동하면 폭주하는 낀다샤도 더는 힘을 못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므시외 타히르’는 작가 자신이다. 그리고 그의 부인과 자녀도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소설 속 그의 할아버지도 실제다. 그리고 많은 내용이 타히르 샤의 개인사와 일치하는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그의 가족은 소설의 배경인 카사블랑카 ‘칼리프의 집’에 지금 현재 살고 있다. (위키백과를 통해 확인) 그럼 [카사블랑카에서의 1년]은 NON Fiction일까? 그의 글은 마치 증강 현실 같은 모양이다. 대부분 사실인 뼈대 위에 허구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타히르 샤의 소설은 구성되는 듯하다. 소재의 고갈 시대를 사는 소설가에게 이러한 증강현실적인 방법은 새로운 영역의 개척 일지 모른다. 마치 게임처럼, 소설 속에서도 점점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무너지고 마치 마약처럼 현실에 허구가 내려와 앉는다. 이것이 요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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