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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Oct 24. 2022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1.

 소설을 읽어가며 자연스럽게 이전에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시골의사]와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떠올리고, 내 맘 속 위대한 단편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 포의 단편은 다른 위대한 작가들의 작업과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 비교하게 되었다. 세 작품집은 현실과 환상의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현실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개인 심리적인 문제와 연결되며 심리는 시간을 무력화시키고, 현실과 환상을 동시성의 평면 위에 세운다. 하지만 세 작품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보다 철학적인 관념의 문제(언어와 시간 등)에 초점이 좀 더 맞춰져 있고, 카프카와 포의 단편은 보다 개인 심리적인 부분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이 둘 중에서도 카프카의 소설은 사회 현실의 문제가 약간 포함되고, 전반적인 분위기는 사회 속에 갇힌 개인의 심리가 불러오는 불안과 환상에 무게를 두지만, 포의 단편은 의지와 이상 심리에 천착함으로써 두 작가와는 다른 공포의 환상을 만들고 있다. 보르헤스의 환상이 현실의 경계와 시간의 문제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라면, 카프카는 사회문제로 인해 드러나는 우울한 개인 심리적 불안과 환상을 드러내며, 포에게 있어 환상은 공포로 인한 것이다. 포에게 공포는 개인 심리적인 차원에 내재한 보편적인 부분이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 - 이 두 단편은 비슷한 에피소드를 다룬다. ‘병 속에서~’가 초기 작품이고 ‘소용돌이~’가 그 보다 이후의 작품이므로 포는 ‘병 속에서~’의 이미지에 서사적인 구성을 보완하고 보다 세밀하게 심리를 드러내는 묘사를 ‘소용돌이~’에 추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병 속에서~’가 생략과 은유를 통해 보다 문학적이고 시적으로 잘 전달하는 듯 보이고, 시인으로서의 포를 더 잘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 단편들은 거대한 자연재해를 대하는 인간의 공포를 다룬다. 하지만 포가 공포를 다루는 방식은 매우 분석적이다. 포는 단순하게 공포를 공포 자체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 공포와 맞닥트린 인간의 이상 심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포는 공포를 분석의 욕망을 포함하는 호기심과 연결시키고, 탐험의 소망과도 연결시킨다. (이것은 정신/심리의 반전이고, 창의성이다.) 그래서 공포의 상황은 그 공포 속에 있는 개인에게 ‘재미’까지 느끼게 하는 이상 심리(?)와 연결시킨다. 이렇게 포를 설명할 때 주로 이야기하는 ‘공포’는 공포 자체라기보다는 재미다. 이것은 오늘날 놀이공원의 ‘귀신의 집’, ‘폐가 체험’, 가장 대중적인 영화 장르 중 하나인 공포 영화의 흥행과 어느 정도 연결되는 동일한 심리를 담고 있다. 포는 극한의 공포 상황에서 분석적이고, 이성적이며, 한편으로는 그것을 즐기는 인간 심리의 단편을 포착하고 있다. 

이렇게 공포가 분석 대상으로 호기심으로 변화하다 보니, 포의 소설에는 공포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끈질김)를 볼 수 있다. 두 단편에서도 소용돌이에 휘말린 주인공은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다양한 분석적이고 창의적인 이성을 동원하여, 탈출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두 작품과 몇몇 초기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인간의지’ 부분은 이후의 작품에서 점점 사라지고, 공포가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

<리지아>, <어셔가의 몰락> - 이 두 단편은 포의 유명한 시 [레이븐]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이 두 단편의 이미지와 감정이 후에 [레이븐] 속에 집약된 듯하다.  <리지아> 시작은 포가 창작한 ‘의지’에 대한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이 의지는 주인공의 아내인 리지아의 죽음에 맞선 삶에 대한 의지이고, 주인공의 리지아에 대한 기억의 의지와 관계한다. 결국 주인공의 끈질김으로 눈이 아름답던 리지아는 죽음 속에서 부활한다. 포의 환상은 일반적인 수동적으로 보이는 환상이 아니라 ‘정신의 끈덕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의지에 기반한 포의 환상은 쫄깃하다.

<어셔가의 몰락>은 주변(사물)과 인간의 동기화를 다룬다. 주변의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편과 불안은 일반적으로 보통의 인간이 느끼는 공포다. 사물은 일방적으로 인물의 정서, 감정 그리고 생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관계의 영향은 심리적으로 인간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 불안을 자극하고, 안전과 평안을 욕망하게도 한다는 측면에서 원시종교(토템, 샤머니즘)의 발생과도 역사적으로 그 맥을 같이한다. 고대의 토템과 샤먼 의식은 원초적으로 이런 환경과의 동기화에서 출발한 것이다. 포의 소설에서 주변 환경(사물)은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일방적인 관계이고, 그것은 오랫동안 노출되고, 농축되면서 공포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자연과의 동기화는 공포를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인간의 감정 속에서 공포의 감정은 농축된다. 이것은 집단의 차원에서 샤먼이나 토템 등으로 극복되지만, (사실 극복이라기보다는 조왕신이나 성주신처럼 공생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는 심각한 이상 심리와 공포로 남을 수 있다

<윌리엄 윌슨> - 한 사람의 좌우 어깨에 천사와 악마가 있어 그들의 속삭임에 반응하는 인간의 이미지로, 포는 이 단편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포에게 있어 정체성은 유사성에서 출발하고, 유사성은 일종의 강박과 공포로 발전한다. 포가 정체성을 다루는 방식도 매우 포답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두 명의 윌리엄 윌슨이 누가 천사이고, 누가 악마이고, 누가 인간일까? 소설 속의 화자는 언뜻 인간이지만, 악마일 수 있고, 천사일 수도 있다. 포는 우리가 친근하게 여기는 유사성에서 불안을 찾고 그 속에 공포가 내재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공포는 반대되는 외부의 것,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농축되어가는 것이고, 나와 비슷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는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군중 속의 사람> - 마지막 문장 “~‘그것은 읽히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아마도 신이 내려주시는 가장 거대한 자비 중 하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왜 ‘자비’인가? 알게 되면 더욱 복잡한 것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이 만든 판도라의 상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사악한 마음은 다른 것들 속에 숨어있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비밀은 신이 세상을 운영하는 전략 중 하나로, 내부의 사악한 마음은 읽히지 말아야 한다. 사악한 마음은 비밀로 간직되고 사악한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이 신의 전략이다. 즉, 우리는 사악한 마음을 알 필요가 없다. 마음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을 통제하려는 순간 더 큰 모호함과 좌절과 오해에 빠져든다. 이것이 ‘사악한 마음은 읽히기를 거부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신의 전략이며, 우리를 보호하려는 신의 자비인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문제이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한 신은 죄가 없다.

<붉은 죽음의 가면극> , <배반의 심장>- <붉은 죽음의 가면극>은 시각적인 색의 이미지(특히 검정과 붉은색)를 공포의 감정과 연결하고 있고, <배반의 심장>은 청각적인 소리와 공포를 연결시키고 있다. 작은 소리에서 시작한 감정은 예민함과 강박으로 증폭되어 공포와 연결된다. 포가 창조한 다양한 영역에서의 공포는 현재 공포 영화의 기본적인 장치들에 속한다.  이것은 시각과 청각 등 자극에 대한 예민함에 반응하는 인간 심리/정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구덩이와 추> - 이 단편에도 가해와 고난, 두려움의 감정이 있지만 포 소설 특유의 의지가 있고, 끈질김이 있다. 이 단편에서 중요한 것은 공포는 환각이나 환상 같은 자가발전 만이 아니라, 현실(reality)이라는 부분이다. 소설에 등장한 고문 기구는 정말 새로운 것이 아니라 중세시대 이단에 대한 단죄를 실행할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포는 중세의 고문을 공포로 생각했고, 실제 현실은 어떤 환상과 환각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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