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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Dec 12. 2022

아이트 벤 하두

독서와 상상력

아이트 벤 하두 - 전경
아이트 벤 하두 - 부분

영화 [반지의 제왕]에는 산비탈에 층층이 세워진 요새가 등장한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미로 같은 요새 안에서 사우론의 오크들과 처절한 공성전을 펼친다. 아이트 벤 하두는 이 요새화 된 유럽 성의 북부 아프리카 버전이다. [반지의 제왕] 속 성채가 대리석 혹은 단단한 돌로 멋지게 지어진데 반해, 아이트 벤 하두는 붉은빛의 흙 성이다. 하단은 돌을 쌓아 만들기도 했지만 상부는 우리나라 옛날 집처럼 지푸라기와 붉은 흙을 반죽하여 만든 전형적인 토성이다. 이 속에 조금 작은 규모의 크사르와 좀 더 큰 규모의 카스바들이 미로로 연결되어 하나의 개미굴 같은 완벽한 요새를 이룬다. 이것은 남부 모로코의 전통적인 가옥 형태로 그 보존 상태 역시 훌륭하여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지금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대부분이지만 이 안에는 학교와 모스크, 축사 등 생활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카사블랑카에서 약 400km 떨어져 있지만, 아틀라스 산맥의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넘나들어야 하기에 자동차로 편도 약 6시간이 걸린다. 이중 3시간가량은 아틀라스 정상의 눈 덮인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조그만 산간 마을들을 지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야 한다. 나는 아이트 벤 하두를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통해 처음 접했고, 그 특이한 이미지에 반해 꼭 한번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강력한 인상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두고두고 남았던 듯하다. 보르헤스의 소설 [알레프]의 첫 번째 단편인 ‘죽지 않는 사람’을 읽으며 계속 나의 머릿속에서는 ‘아이트 벤 하두’가 등장했다. 소설 속 로마의 장군은 죽지 않는 사람의 도시를 찾아 길을 떠나고,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사막에서 기진하여 쓰러진다. 그리고 그가 정신이 들어 깨어난 장소는 언덕 비탈에 위치한 구덩이 속이었다. 이 구덩이 맞은편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듯 마는 듯하고, 그 앞으로 버려진 거대한 성채, 즉 아이트 벤 하두가 있다. 주인공은 이 성채가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임을 직감하지만 성채는 이미 버려져 아무도 살지 않았고, 미로를 통해 저승으로 연결되는 듯한 지하로 들어갔다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바깥에서 주인공은 죽지 않은 사람, 그리스 시인-하지만 시간의 늘어짐으로 기억이 바래버린 ‘호메로스’와 조우한다. 아이트 벤 하두는 책을 읽는 내내 구체적인 모습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우연의 일치 인지 모르지만 아이트 벤 하두 정문 앞으로는 며칠 전 비가 와서 물줄기가 생겨 실개천이 흐른다. 그리고 카스바 내부는 빛을 허락하기엔 너무나 작은 창이기에 마치 소설 속 지하공간과도 같은 음산함이 있어, 마치 어딘가 지하 세게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을 것 같은 기대를 준다. 이런 생각에 젖어있을 무렵 대여섯 명의 젊은 단체 관광객이 아르헨티나 국기를 품에서 꺼내어 아르헨티나의 4강 진출을 축하하는 듯한 행위를 하고 있다. 보르헤스도 그들처럼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까? ‘죽지 않는 사람’의 실제 배경이 이곳은 아닐까?

독서는 이런 식이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그 내용과 부합하는 아는 장소와 인물을 떠올린다. ‘죽지 않는 사람’ 속 로마 장군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우고, 기억이 바랜 호메로스는 영화 [25시]의 띨띨한 앤서니 퀸이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익숙한 것들 속에서 조금 다른 것을 만들어 낼 뿐이다. 이것은 책의 한계이고, 독서의 한계이고, 독서를 하고 있는 나의 한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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