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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un 07. 2023

한 점 하늘, 김환기

호암 미술관

 김환기 작가의 주요 작품이 시간 순서에 따라 2층에서부터 1층으로 전시되어 있다. 한 작가의 몇몇 작품을 띄엄띄엄 보는 식이 아니기에 이번 전시는 화가 김환기 자체다. 작품 속에서 읽어지는 그의 치열한 고민이 보이고, 서양 회화의 유영 속에서 자신을 붙잡아 가려는 그의 처연한 노력이 애잔하다.

[한 점 하늘, 김환기]는 서양 미술사 자체다. 원색의 색면에선 마티스와 몬드리안이 보이고, 몇몇 산(山) 그림에서는 세잔이 실험한 몽 생 빅투아르가 느껴지고, 학의 날갯짓은 미래주의자 자코모 발라의 코믹한 발발이를 연상시키며, 항아리를 가로지르는 매화 가지의 선은 화화를 음악과 접목하려 한 칸딘스키적 노력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각형 안의 점으로 수렴될 때, 나는 절대주의자 말레비치의 모습도 본다. 그는 서양 화가다. 몇백년의 시행착오로 축적된 서양 미술 사조를 짧은 시간에 따라가려는 그의 노력은 작품 속에서 드러나고, 모든 사조는 김환기의 작품 안에서 압축되었다. 그리고 광범위하고 다양한 서양 회화 사조의 수많은 INPUT 속에서 자신을 지켜가는 그의 의지가 위태롭고, 롭다.

 김환기 읽기는 ‘그가 생애를 통해 지켜가려 한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는 먼저 그의 작품 속 배경에 주목한다. 비록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지만, 파스텔 톤의 색조와 두터운 붓 터치, 테레빈유를 많이 활용한 선의 번짐은 마치 한지에 그린듯한 착각을 준다. 그의 이러한 한지 같은 배경은 달 항아리, 학과 같은 한국적인 소재를 얹었을 때 더욱 한국적인 빛을 발한다. 그리고 파리 유학을 거치며 한지의 느낌은 차츰 줄어들고, 벨벳 같은 따듯한 색면과 두터움으로 변해가며 차츰 서양의 카펫을 닮아간다.(1956년작 [정원] [정원II]) 그리고 말년의 전면점화 시기에 한지의 특징은 배경보다는 선과 점의 번짐을 통하여 다시 부분적으로 차용된다.

 두 번째는 그의 구도다. 김환기의 과감한 구도는 서양 회화의 중요한 특징인 평면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푸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걷고 있는 인물’을 묘사한 [답교]는 입체적인 공간을 고스란히 평면 위에 세웠다. 화폭을 분할하는 나무와 푸른 강이 있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여백의 공간을 만들고 감상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숨을 쉬게 한다. 그리고 달과 항아리를 가로지르는 매화 가지는 화폭을 답답하게 하기보다 [답교] 속 강과 다리처럼 여백(공간)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김환기가 붙잡으려 했던 것은 소재에 있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달 항아리, 편병을 비롯한 백자와 매화, 둥근달, 사슴, 학 등은 매우 한국적인 소재들이다. 이러한 소재들은 전면점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는 중심 소재가 된다. 특히 항아리와 달의 대비는 우리의 선비정신과 여유, 고고함을 느끼게 한다. 이런 모든 것이 서양 회화의 전통 속에서 변주된다는 것이 김환기의 특징이다. 다른 그 시대의 서양화가들처럼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는 서양 회화의 전통 속에서 동양/한국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제 ‘점’이다. 그의 모든 그림은 ‘점’으로 환원된다. [우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리고 [하늘과 땅]에서 표현된 빽빽한 점은 별처럼 보인다. 여기서 나의 고민이 솟아난다. 김환기에서 ‘점’은 별인가? 만약 점이 별이라면 김환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왜냐면 그것은 대상에 대한 ‘재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김환기의 소재인 달, 달 항아리, 사슴, 학, 백자, 매화 등은 모두 별로 환원되었다. 이때 별/점은 우주의 기원 물질의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이것은 환원일 수 있지만, 자칫 퇴행으로도 보인다. 이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서양 회화의 전통에서 재현은 죽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김환기인데 단순히 점을 별의 재현으로 사용했을까? 이런 기우는 [9-V-74 #322], [19-III-74 #329], [17-VI-74 #337] 이 3개의 작품을 보고 해결된다. 김환기의 점은 선에 의하여 균열을 만들고, 답답함을 벋어나 숨 쉬는 통로를 만들었다. 가지런하게 벼가 심어진 논에 시원한 물길이 난 느낌이었다. 김환기는 우주의 기원일 수 있는 빽빽한 점들 속에 몇 개 여백의 길을 냄으로써 그림에 숨을 쉬게 했다.

 김환기 스스로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그의 서양 회화 작업 속에서 한국적인 것을 담아내려 했다. 초기에는 달, 달 항아리 등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이 모든 것은 점으로 발전한다. 모든 것을 응축한 점의 고밀도에 숨 길을 틔워주며 김환기는 그만의 세계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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