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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un 19. 2023

[천일야화] 앙투안 칼랑

 1.

타히르 샤(아프가니스탄 계 영국인)의 소설 [카사블랑카에서의 1년]에 등장하는 ‘아이샤 깐디샤’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천일야화] 읽기로 나를 이끌었다. 아이샤 깐디샤는 집안의 정령으로 우리의 ‘성주신’과 비슷하다. 이방인인 타히르 샤는 자신의 집을 개보수하면서 정령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의 집사들과 1년 동안 갖가지 사건으로 부딪힌다. 깐디샤는 정령으로 [천일야화] 알라딘 이야기 속 ‘지니’와 같다. 그런데 유일신 알라의 세상에 정령이 웬 말인가? 우리네 토속 신앙처럼, 비록 후세에 이슬람으로 통일되었지만, 민중의 삶 속에는 여전히 정령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전히 새 자동차 바퀴에 막걸리를 뿌리고, 새집에 실로 꿴 북어를 걸어두고, 지갑에 부적 하나쯤 넣고 다니는 우리와 비슷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슬람 세계에서 [천일야화]는 [성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양의 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 속에 오마주로 인용되는 단테의 [신곡]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로/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는 앙투안 칼랑의 [천일야화]를 읽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의 이러한 기대는 번역과 창작 그리고 판본의 문제에서부터 판판히 깨져버렸다.

앙투안 칼랑의 [천일야화]는 시리아 본 아랍어 판의 번역본이고, 몇몇 이야기는 다른 경로를 통해 앙투안 칼랑의 번역 작업 속에 추가되어 출간되었다. 그리고 뒤의 두 부록은 아예 칼랑의 번역이 아닌 다른 사람의 번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칼랑은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프랑스의 풍속’을 이야기하며 다소 풍속에 저해되는 부분은 순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형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적극적인 변형은 후에 다른 판본을 가지고 작업한 리처드 버튼 판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리처드 버튼은 앙투안 칼랑의 번역이 의도적으로 누락한 선정적인 부분을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아랍어 판본에서 직접적으로 번역된 ‘천일야화’는 없기에 누구의 주장이 옳고, 정당한지 알 길은 없는 듯 보인다. 분명한 것은 앙투안 칼랑은 그의 경력(외교관과 교수)에 걸맞게 원본에 좀 더 점잖은 번역을 시도한 듯 보이고, 180년 후 리처드 버튼은 역시 그의 경력(군인과 스파이)에 걸맞게 좀 더 선정적인 아라비안 나이트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판본을 비교해 볼 마음은 없지만(리처드 버튼 본은 굉장히 방대하다.) 앙투안 칼랑 본의 번역에서 포도주의 음용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거론된다는 측면에서 좀 더 적극적인 변형이 의심되기는 한다. 이런 적극적인 번역의 이유로 [천일야화]는 아랍문학이라 불리기보다 ‘서구문학’으로 불리는지 모르겠다. 앙투안 칼랑이나 리처드 버튼이나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자신의 번역에 적극적으로 담아냄으로써, 단지 소재만 아랍적인 것일 뿐, 서구문학의 전통 위에 서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나 그것의 실사판이 - 윌 스미스가 지니로 나오는 알라딘 – 철저한 서양의 의식과 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디즈니는 지니를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서양의 자유주의적 가치 전파를 주요 내용으로 가미하고 있다. 디즈니쯤 오면 완전히 [천일야화]는 버터향 진한 서양 콘텐츠가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서양문학의 역사 속에서 [천일야화]는 서양에서의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초기 인식을 규정한다. 지금까지도 진행되는 현재진행형의 아랍과 이슬람의 풍습에 대한 오해와 지독한 선입견은 [천일야화]의 번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동양의 엄청난 부(왕국의 보물창고, 보석으로 만든 궁전 등)와 아름답고 신비로운 천상의 미모를 가진 여인들에 대한 묘사는 서구인들의 머릿속에 막연한 환상을 만들었고 몇백 년 동안 재생산되어왔다. 약 180년의 시간차를 두고 영어로 번역된 리처드 버튼 판은 아랍과 이슬람에 성적인 환상을 심었고, 실제 비밀에 싸여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궁정 여인들의 공간 ‘하렘’의 존재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대한 성적 환상에 기름을 부었다. 발생과 국적을 알 수 없는 반나의 벨리댄스는 아랍의 traditional dance라는 인식을 심었고, 티치아노, 도미니크 앵그르, 마네의 누드화는 아랍 여인의 막연한 관능미를 자극했다. 이렇게 [천일야화] 이후 아랍과 이슬람은 서양인의 생각과 상상 속에서 왜곡되고, 정치적인 의도를 담아가며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모른다.


2.

[천일야화] 속 많은 등장인물의 직업은 상인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계약과 신의에 기반하여 사건을 접근하고 해결한다. 이슬람은 상업에 기반한 종교다. 인도와 중국의 향신료와 모직들이 아랍 및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이런 루트상의 발달한 도시가 카이로, 메카,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바스라가 된다. [천일야화]에서는 이 도시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며, 착한 주인공들이 사는 배경이 된다. 여기서 하나의 가설이 생길 수 있겠다. 종교와 산업을 한번 짝 지어보자! 가톨릭과 불교는 농업/목축업을 기반으로 한다. 이 시대는 땅이 중요하고, 이런 농업적 생활양식과 방식은 가톨릭과 불교의 교리와 양식 속에 분명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는 공업과 상업을 기반으로 한다. 공업과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의 종교가 개신교다.(이것은 종교개혁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럼 현대의 금융산업이 끌어올린 종교는 무엇일까? 아직 나의 공부 수준이 미약하여 직접적인 근거를 찾지는 못하겠지만 과학과 이성이지는 않을까?


3.

앙투안 칼랑의 [천일야화]는 액자식 구성이다. 어떤 경우 3개의 액자가 겹쳐지며, 자칫 잘못하면 이야기가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유사하다. 이슬람 제2의 경전 하디스의 시작은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 누구에게 ~ 들었다’의 형태로 시작한다. 과거에는 이런 액자식의 구성이 매우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천일야화]에서 알라딘은 중국인이다. 특히 앙투안 칼랑 본은 삽화가 있는데 우리의 귀엽고 장난스러운 소년 알라딘은 뒷머리를 길게 땋은, 변발을 한 중국인으로 그려진다.

[천일야화]는 타임머신 화법을 사한다. 소설 속 액자의 가장 외곽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그 배경으로 하는데, 사산조 시절의 이야기 꾼 ‘세에라자드’의 이야기는 사산조의 후대에 해당하는 압바스 왕조의 왕의 시대를 주로 그 배경이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과거의 인물이 미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도 처음에는 사산조 페르시아로 시작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인도’라고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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