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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ul 03. 2023

[갈매기, 세 자매, 바냐 아저씨, 벚꽃동산]를 읽고

동서문화사

어느 정도 이름이 문단에 알려지고, 나와 나의 작품이 비평의 대상이 되고부터 우리 위대한 선배들(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존재는 무거운 공기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긍정이든 혹은 부정의 비평이든, 선배들의 거대한 장편 세계에 대비되는 나의 조그만 현실 세계를 비평가들은 들먹였다. 간혹 그 비평은 도를 넘어 내 출신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10년 전 톨스토이 형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잊지 못할 첫인상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더부룩한 흰 수염과 커다란 덩치에서 내리꽂는 그의 서늘한 눈빛은 귀족 출신 행동가,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가는 대 문호의 위용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곧 나는 위대한 형님들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며, 세상의 비판을 견뎌 나갔다. 솔직히 ‘견딤’ 외에 어떤 방식이 있을 것인가? 어릴 때부터 나는 먹고살기 바빴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고, 정신 못 차리는 두 형님을 대신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런 경제적인 것들이 내 문학의 성향과 스케일을 규정했다. 나는 잘 팔리는 유머 단편을 쓰기 위해 독자들의 취향과 트렌드를 연구해야 했고, 빨리 원고료를 받아야 했기에 짧은 시간에 단편을 완성해야 했다. 젊은 시절 나는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동일 작품을 구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쓰기 근육은 단거리 선수에 맞는 백색근 위주로 발달된 듯하다. 그리고 나는 태생적으로 도스토옙스키 형님 같은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일 수 없다. 나는 근본적으로 장난과 농담을 좋아하는 밝은 희극배우가 더 어울린다. 이런 밝음은 내 안에 DNA로 있었을 것이고, 이런 성향은 유머 단편을 쓰며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사실 도스토옙스키 형님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읽기는 나를 아프게 했다. 계속해서 밑으로, 밑으로 끌려가는 감정에 욕지기가 나오기도 했다.

나는 나름대로 단편에서 희곡, 그것도 장막극으로 변화하면서 어느 정도 비평가들의 비판과 내 스타일의 타협과 조화를 이뤘다. 장편소설이라고 모두 의미를 가진 문장일 수 없다. 의미로 구성된 문장의 이음들은 많은 부분이 부차적이거나 보완적인 supplement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희곡에서 ‘대사’로 간단하게 처리하고, 서사를 이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폭넓고 깊이 있는 묘사는 희곡에서 간단한 대사로 처리될 수 있다. 그 대사가 다른 대사와 의미상의 연결을 가질 수도 있지만 따로 분리되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각각의 대사는 관객에게 전달되어 관객의 사고와 감정 안에서 의미로 뭉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편 소설에서의 사건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희곡에서 대사들의 연쇄로 처리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내용적인 면이다. 몇 년 전 톨스토이 형님의 농장을 다녀오며, 며칠 동안 나의 귓전을 때리는 지식인들의 사회 변혁과 개혁 그리고 교육이라는 외침에 신물이 넘어온 적이 있다. 선의로 시작한 그들의 나로드니키(농민 속으로)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한계를 농촌에 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농민들을 교육의 대상, 변혁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바꾸고 사상을 주입하려 하였지만, 내 생각엔 그건 너무나 뜬구름 잡는 식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결심했다. 나만의 나로드니키를 해보기로…, 먼저 말하지 않고 그냥 내가 가진 기술(의술)로 그들의 옆에 있어 주기로 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나는 나의 희곡에 ‘견디며 꾸준히 살아가는 삶’을 담고자 했다. 나의 이런 생각/의도는 [갈매기]에서는 니나의 대사로, [세 자매]에서는 올가/마샤/이리나의 결심으로 또 [바냐 아저씨]에서는 소냐가 바냐 아저씨와 나누는 마지막 대사에 담았다. 요즘같이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는 말로 긍정의 미래를 외치는 아스토로프([바냐 아저씨]), 베르쉬닌([세 자매]), 트로피모프([벚꽃동산]) 보다는 묵묵히 견디며 삶을 끈질기게 살아가는 러시아 여인들이 더 위대하다. 뭐 특별한 사상과 주의가 있겠는가? 현실을 묵묵히 살아가는 수밖에…, 묵묵히 견디는 삶이 내세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의 대사다. (220 페이지)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이 대사에서 예수를 생각했다. 다소 [바냐 아저씨]의 결말이 종교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 마지막 내세로 확장된 견딤과 보상이라는 메시지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단순히 견딤의 의지뿐 아니라 약간의 보상 같은 것을 주고 싶었다. 그런 약간의 보상이 없기에는 바냐 아저씨와 소냐의 견딤이 너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젠 기침을 하면 핏덩이가 넘어오지만, 초연을 위해 만들어진 벚꽃동산의 무대가 화사하다. 돌아가면 정원에 벚나무 몇 그루를 더 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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