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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Aug 18. 2023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보르헤스를 읽을 때와 같은 짙게 깔린 무거운 안개 같은 변비는 아니다. 어느 한적한 시골의 여러 개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어떻게 의미 지워야 할지 모르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오는 길에 중요한 이정표를 놓친 것인가? 아니면 길 위에 내 생각을 흘린 것인가? 다 읽고 난 후 일주일을 들고 다녔다. 유의미한 이정표를 찾으려고, 또 내가 흘린 생각들을 주워 담기 위해 부분 부분 읽고 다시 생각했다. 욥기 3장을 읽었고, 몇몇 유명한 책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았다.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공간을 찢는 제3의 공간으로서 선택의 자유도 이해하겠고, 부제(The Story of Wallstreet)에 기반한 인간 소외와 자본주의 비판의 논조도 일견 유의미한 해석임을 알겠다, 또, 마지막 부분 바틀비의 과거 직업에 논거를 둔 상실과 죽음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소설에서 바틀비의 대사로 반복되는 유명한 문구,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는 YES or NO의 명확한 세상에서 개인의 선택이라는 자유 개념을 도입하여 회색지대를 창조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런 논리는 번역(‘선택’)이 만든 오해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월(Wall) 스트리트, 벽으로 난 사무실의 창, 필경사라는 단순한 직업을 삭막한, 인간성이 상실된 자본주의 상징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의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외면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바틀비의 과거 직업(죽은 편지를 다루는 사람)은 ‘저는 특별하지 않습니다’라는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에 부합되지 않는다. 

여전히 의미의 방향에 의문이 많고 당황스럽지만, ‘저는 특별하지 않습니다’를 나는 의미 해석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이 대사는 바틀비의 거취가 파국으로 치닫는 후반의 극한 상황에서 과묵한 바틀비 스스로가 ‘I would prefer not to’와 같이 몇 번 내뱉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르지 않다. 그의 독특함은 동정과 혐오와 모멸감을 끌어들이며 정신 승리로 자신을 끊임없이 위장하는 화자인 나와 다르지 않고, 오전과 오후에 감정을 출렁임을 보이는 터키와 니퍼스와도 다르지 않다. 그는 특별하지 않다. 

여기서 방향을 한번 바꿔보자. 우리는 주로 바틀비의 대사와 행동에 주목하여 의미를 해석하려 하지만, 어느 정도 멜빌의 의도는 ‘나(화자)’에 중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실제 [필경사 바틀비]에서는 바틀비의 고용인인 변호사, ‘나’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다. 그의 심리는 매우 이중적인데, 그는 동정과 가혹함(이기심) 사이에서 늘 번민한다. 모욕감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적인 변명을 덧붙이며 정신 승리의 광명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경우 소극적인 가혹함으로 사무실 이전과 도피를 강행하기도 한다. ‘나’의 머리는 바틀비가 등장한 이후 동정이든 가혹함이든 완전히 바틀비에 메여버린다. 만약 여기에 동조한다면 [필경사 바틀비]는 절대 악에 대응하는 인간 심리의 다양한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고 읽을 수도 있겠다. 이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틀비는 가해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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