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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Sep 11. 2023

[모비딕] 허먼 멜빌

 이것은 ‘영혼’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영혼’이라는 단어는 ‘고래’라는 단어만큼 자주 등장한다. 1850년 미국, 아직 초기 개척자들의 경건주의가 용골에 녹아있고, 종교가 개인의 삶을 재단하는 시대에 멜빌은 살았다. 그의 작품에 흐르는 성경 속 에피소드와 구절은 작가의 종교적 영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요나의 체험, 선지자 일라이저의 등장, 욥과 리바이던, 다니엘의 환상 등이 고래잡이 일상과 버무려져 등장인물의 행위 속에 스며든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는 영혼을 신체와 대비하지만, [모비딕]에서는 정신(이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합리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사고(스타벅)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에이해브 선장의 영혼은 광기로 채워진다. ‘영원한 생명 원칙’인 영혼은 에이해브에게 오면 ‘교활한 생명 원리’가 된다. 돛대에 금화를 박으며 펼쳐지는 에이해브의 선원들을 향한 선동과 이교도들의 피로 담금질을 하여 만들어지는 그의 작살 제작 퍼포먼스는 이성을 타고 있는 영혼의 교활한 광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런 과정에서 스타벅으로 대변되는 냉정한 이성은 설자리를 잃는다. 이전 항해에서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후, 돌아오는 배 안에서의 처절한 광분의 표현은 시간에 의해 정제되고, 이성의 파리한 철재 왕관 위에 광기의 보석으로 박혔다. 그래서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향한 복수라는 목표에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스타벅과의 대화에서 감정을 자극하는 가족에 관한 대화는 결국 모비딕에 대한 복수는 운명으로 맺음 된다. 

이렇게 지양점으로 꽉 찬 영혼은 ‘의지’와 비슷한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영혼을 의지로 바꿔 읽어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다. 소설의 초반 일라이저는 화자인 이슈메일에게 ‘영혼에 대한 계약’도 하였느냐’고 물어본다. 에이해브의 꽉 차다 못해 넘치는 의지는 그의 교묘한 정치적 행위에 의해 피쿼드호의 모든 선원들에게 나누어진다. 이런 광기에 찬 영혼은 그들의 목적을 환기시키고, 30이 하나가 되는 경이로움을 만든다.


[모비딕]과 [필경사 바틀비]

한편 [모비딕]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필경사 바틀비]에서 작가가 무슨 시도를 하려 했는지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다. [필경사 바틀비] 역시 같은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영혼의 양과 방향성은 반대다. 허먼 멜빌은 [모비딕] 이후, 에이해브와 반대되는 인물로 바틀비를 창조한 것이다. 꿈틀거림, 광기로 꽉 찬 영혼이 에이해브라면, 느림/비워감, 텅 빈 영혼으로 바틀비를 상정한 것이다. 에이해브의 영혼은 에너지가 서서히 증가하며 폭발하고 분명하게 한 지점을 목표로 가져가지만, 바틀비의 영혼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비워진다. 의지와 욕망으로 채워진 에이해브의 세상은(고래잡이로 묘사되는) 거친 뱃사람들의 세상이고,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바다와 같은 현실의 일반적인 세상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이런 현실의 세상(포경선의 번잡스러움에 못지않는 월스트리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매우 암울하지만 그것은 의지의 비움, 욕망의 버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바틀비의 영혼은 순수하게 연마된다. [모비딕]에서 영혼은 채워진다면, [필경사 바틀비]에서는 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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