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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Oct 24. 202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힘에의 의지

의지는 가치중립적이다. 니체가 사용하는 ‘힘에의 의지’ 역시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므로 이 의지는 난폭하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 약육강식의 세계를 이상화시켰다. 힘에의 의지는 오로지 상승의 방향성을 지닌다. 이 의지가 가치중립적이라면 아래로의 방향성도 고려해 볼 만한데 그는 오로지 상승만을 교설한다. 그는 위/아래(외부/내부)라는 방향성을 선과 악이라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개념(니체의 표현이다)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 용어를 끌어들여 ‘건강함과 허약함’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로 힘에의 의지가 사바세계에서 덕으로써 작용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상식으로서의 건강함은 (니체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善으로 작용한다. 건강함을 ‘선’으로 보았다는 것, 이것이 니체 사유의 질주 속에 숨어 있는 오류 가능성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는 건강함을 (니체가 긍정하는 종류의) 힘의 추구로 설명하며, 자기 극복을 위한 노력과 창조력의 배양, 단호한 펼침을 내세우지만, 철학적이라기엔 너무나 주관적이다. 

비열함, 시기심, 질투심 역시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힘에의 의지다.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어 자신을 괴롭히고, 상대를 증오하고, 상대의 파멸을 진심으로 바라며 기존 체제를 전복하여 자신의 안일한 세계, 질투심 가득한 이기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것 역시 힘에의 의지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긍정적인 상승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니체의 설명 속에 상승/건강함은 선이라는 ‘확장된 덕’이 작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니체는 금수의 의지를 긍정했다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중요 개념과 그의 덕은 도덕의 토양 위에 세워진 것이다. 

불교철학 대비 니체의 철학이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보편적인 善’의 부재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대자대비와 같은 보편적인 선의 부재라기보다 니체는 다른 종류의 선을 사용한 것이고, 이 선은 자연에서 빌어온 것이다. 비록 기존 사바세계에 존재하던 선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에서 가져온 선(건강함)을 의지의 보편에 깔므로써 비록 약한 고리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데 성공한 듯하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씀에 힘입어 건방지게 니체를 품평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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