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모두 읽었을 때의 인상
성경의 패러디다. 니체 철학의 은혜로 탄생되었던 패러디 개념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거슬러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니체는 복음을 쓴 것이다. 신약 속 예수의 뜨문뜨문 알려진 삶에 좀 더 풍성한 인간 예수의 고민 흔적과 수련의 세세한 과정을 추가하여, 막연하고 두리뭉실한 이야기를 좀 더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양치기’의 득도 장면이 보이고, 예수의 행적(최후의 만찬 같은)은 스토리 라인에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넘어, 예수에 대한 종교화를 비판하며 인간의 자기 극복과정을 중심에 둔, 남겨진 자들을 위한 복음을 쓴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인간을 위한 새로운 신약(新新約)을 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산문 서사시다. 서사를 따라가는 내내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푸쉬킨의 [예브게니오네긴] 속 운율의 울렁임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시적인 반복이 있고, 대비를 통한 격정이 느껴지고, 끌어올린 감정을 한순간에 떨어트리는 극적 카타르시스가 있다. 망치의 철학자 니체는 글쓰기에서도 기존 형식 파괴의 성공을 이루어내고 있다. 정형적인 형식은 니체 앞에서 가루가 되어 부서진다. (번역문에서도 나는 시적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또, 이것은 구도소설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보르헤스의 조그만 단편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을 떠오르게 한다. 10년간 수련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장으로 내려오는 ‘몰락’의 길을 스스로 가지만, 실망을 거듭하고 1편의 끝부분 그는 도망치듯 인간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떠나면서 겪는 상황이 2부에 펼쳐지고, 2부 말에 그는 부족함을 자각하고 다시 산으로 와 은둔자가 된다. 그리고 4부에서는 마치 예수의 제자를 연상시키는 ‘차원 높은 인간’들이 찾아오지만, 결국 이 모두를 떨치고 혼자가 되어 건강한 세상 변화의 징후를 느끼며 이야기를 맺는다. 이런 구도의 과정 속에 이런저런 고민들과 생각들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