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떠나 화엄의 세계로 가는 길
내 속에 의지를 채우고 나는 듯 몰락을 길을 걸었다. 아침의 태양이 비췄던 그곳으로 내려간다. 언제나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하다. 경사는 내려가는 수도자의 발을 걸어버리기 때문이다. 차라리 가파른 경사가 더 낫다. 미리 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어정쩡한 경사에서 구른다. 달뜬 의지는 머리를 치받고, 몸에 열을 만들어 낸다. 나의 의지는 경사에 집중하고, 경사는 의지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평탄한 길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나의 모든 의지를 잊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이제 관성의 靈이 작용할 시간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서 잠시 숨을 참고, 죽은 척했던 관성이 깨어났다. 이 관성이 나의 다리와 발을 인도한다.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관성은 나의 생각을 읽었고, 나의 바람을 읽었다. 관성은 체화되어 마치 몸과 하나처럼 보인다. 이리저리 변하는 열풍에 마른 꽃잎이 지그재그의 골목을 어지럽게 구르듯, 관성은 나를 뒷골목 여기저기로 인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없다. 하늘 높이 쌓아 올린 꿉꿉한 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책장이 담 높은 골목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나는 다시 책들의 세상에 파묻혔다. 관성이 나를 이리로, 익숙한 곳으로 끌었다. 한동안 책의 제목을 읽으며 골목을 걷는다. 모든 것이 피상적이고, 눈에 만 묻을 뿐이다. 눈에 묻은 제목은 나의 영혼 속에서 망상의 옷을 입는다. 아! 지겹다. 이젠 이 자극의 세계가 무섭다. 얼마나 많은 자극이 나의 몸을 찔렀던가! 행동과 결단이 없는 자극은 얼마나 잔인하고 허무한가! 자극의 가시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나는 자극에 지쳐 도피의 잠에 빠진 것이 몇 날인가? 아! 이 지긋지긋한 자극! 그런 자극의 가시 속에서 관성의 영은 고독에 든다. 관성의 영이 고독에 들고, 나의 생각은 멈춘다. 생각도 고독에 접어든 것이다. 모든 생각이 나의 머리를 관통한다. 하나도 어지럽지 않다. 모든 것이 맑다. 가시밭을 외면하며 우회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은 위안을 찾는다. 이제 가시 끝은 무뎌지고 가시는 더없이 부드러운 이불이 된다. 이제 자극은 없다. 얼마간 자극은 이렇게 잠을 잘 것이다. 잠을 잘 것이다. ZZZ ZZZ
“자! 이제 가자! 내 미리 봐둔 곳이 있다.” 관성의 영이 깨어나 나를 흔들어 깨운다. 덮고 자던 이불에선 다시 가시가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다시 좀비처럼 관성의 인도로 그 영이 가리킨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관성은 나를 [화엄경]의 뼈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것은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와 묶여서 선물용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이 선물용 주위에 화엄의 성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다만 맛보기 같은 허술한 골조를 전시한 조그만 공간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화엄의 뼈에 붙어있는 조그만 살 조각을 떼어보고 맛봐야 한다. 그 모형 뼈는 너무나 깨끗하게 발골되어 어떤 살 조각도 얻을 수 없을지 모른다. 관성의 영은 나에게 인내를 갖고 읽어보기를 원한다. 구도의 길로 들어선 이래 나는 읽기의 인내라는 근기는 조금 키웠던 터라, 살 하나 붙어있지 않은 지루한 [화엄경]의 뼈대 모형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관성의 영이 나를 이 화엄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화엄경]이 나의 오랜 숙원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영악하고 영악하다. 다시 나를 화엄의 문 앞에 세웠구나. 관성의 영은 뒤로 갈까 봐 염려하여 먼저 뼈대 모형 앞에 세우는 교활함을 보였다.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을 가득 채웠던 ‘동정의 부정’은 [화엄경]의 뼈대 앞에서 금이 간다. 깨끗한 뼈다귀뿐이라 그 모양을 제대로 볼 수는 없지만, [화엄경]은 전체가 동정으로 채워진 것으로 보인다. 보살의 길은 보시바라밀로 시작하는 중생을 위한 동정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중생에 대한 동정으로 보살은 보살의 의지를 발하고, 금강과 같이 굳건히 하고,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뼈대만으로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10의 지옥 같은 뼈 마디마디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신을 죽인 동정이 골수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 역시 동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의 몰락은 동정을 밑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그는 부정하지만) 이제 나는 화엄의 개구멍에서 동정을 화두로 선정에 들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의지인데, 꿈틀거리는 ‘힘의 의지’는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서 화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극복과 화엄에서의 보살의 길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차이라면 한쪽이 인간의 생각을 분석하는 미시적이고 철학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보살의 길은 좀 더 선언적이며 교육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화엄에서는 초발심의 경지에 대한 존중과 그 환희로 보살의 길을 시작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인간 의지의 수련, 자기 극복의 완성을 통해 초인의 길을 간다는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대승의 종교적 모습을 제외한다면, 차라투스트라의 의지와 동정은 초인과 보살에 이르는 같은 길로 보인다.
이제 뼈대를 품었던 안개가 걷히고, 저 멀리 화엄의 산이 보인다. 겁이 난다. 얼마나 오래 나는 저 화엄의 가시 숲에서 고행할 것인가? 그 고통은 얼마나 지독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비록 언젠가는 들어가야 할 산이지만, 비록 몇 겁을 반복하여 들어가야 하는 산이지만…, 중력의 영은 나의 등 뒤에서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