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평면성에 대하여
회사 식당에 연말을 기념하여 가져다 둔 눈사람 인형들이다. 이는 한 가족인가? 두 가족인가? 두 가족이라면 왼쪽 셋이 아빠와 엄마, 아들이고, 오른쪽 셋은 엄마와 아들과 딸로 보인다. 오른쪽 가족의 아빠는 어디 갔을까? 출근했을까? 아니면 오래전에 사별했을까? 오른쪽 가족의 꼬마들이 서로 다툰 것 같다. 오른쪽 꼬마는 뭔가에 여전히 삐져있고, 가운데는 엄마의 달램에 다소 누그러진 모습니다. 왼쪽 가족의 아빠는 오른쪽 아이들을 향해 왜 싸웠는지 이유를 묻고 있고, 그 옆의 엄마는 모른 체하라고 핀잔을 주는 듯하다.
1912년 칸딘스키는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통해 자신과 그의 친구들의 작업에 이론적 뒷배를 제공했다. 사진술의 발명으로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 회화는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전개했고, 그 중심에 추상주의와 색채주의가 있다. 이는 회화의 원류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고 그들의 재료에 대한 환기에 해당한다.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색과 형(色과 形)의 평면 속에서 울림과 공감, 더 나아가 정신적인 것들을 담으려 했던 도전이었다. 현대 많은 화가들의 캔버스가 단순화된 색과 형의 공간에 머물고, 눈의 왜곡과 원근법의 환상을 극복하고 있다는 면에서, 칸딘스키와 마티스의 도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회화에서 색과 형이 회화의 원류(평면성)를 환기시켰다면 소설에서는 비유가 그에 해당될 듯하다. 비유는 구체적인 像을 만드는 작업이다. 익숙한 비유를 통해 소설 속 주인공들이 깨어나고, 바람이 불고, 주변은 젖은 안개에 휩싸이고, 그 속에서 독자는 주인공의 고뇌와 고통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비유를 통해 대상에서 관계를 읽고,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이것은 서사의 입체화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