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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Jan 31. 2024

[멜랑콜리아 1] 욘 포세

욕망은 현실 위에 떠있고 그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의해 흔들린다. 욕망의 흔들림은 필연적으로 진물 같은 것, 탐탁지 못한 불안과 강박이라는 끈적한 부산물을 만든다. 이렇게 욕망은 불안과 강박 위에 세워짐으로써 더욱더 흔들리고 울렁인다.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그림과 사랑에 대한 욕망(사랑을 그림에 대한 뮤즈로 본다면, 궁극적으로 그의 욕망은 하나다. ‘그림’에 대한 욕망)은 지속적인 불안과 강박에 의하여 계속 흔들린다. [멜랑콜리아 1]의 서사는 아주 느리게 앞으로 전진한다. 서사가 느린 이유는 서사와 나란히 병행하는 헤르테르비그의 생각이 자꾸 원점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서사는 조금 앞으로 가다가도 주인공의 생각과 뭉쳐져 시간을 거꾸로 구른다. 주인공의 불안과 강박은 생각과 감정의 ‘원점 회귀’를 통하여 서술된다. 원점 회귀는 그의 우울증 증상이면서, 우울증의 소설적 장치가 된다. 원점 회귀적 사고는 첫 번째 덩이(독일에서의 에피소드)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두 번째 덩이인 정신병원에서는 다소 약회 되다, 마지막 덩이인 작가 비드메의 등장에서는 아주 많이 약화된다. – 그래서 독자는 처음 249페이지를 잘 참아낸다면 뒤쪽은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보통 이런 무한 반복 같은 원점 회귀는 지난한 감정의 세부 묘사를 병행하면서, 독자를 탈진상태로 몰아가지만, 욘 포세 式 담백하고, 물기 없는 문체는 문장의 습기를 제거함으로써, 바스러질 것 같은 불안과 강박의 느낌을 담아, 그 위에서 흔들리는 욕망 역시 좀 더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스릴있다. 언뜻 소설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덩이에서 헤르테르비그의 ‘그림 욕망’은 사랑과 종교에 묻혀 버린 듯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림을 금지당한 정신병원에서 헤르테르비그는 ‘자위행위’를 통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세 번째 덩이에서 그의 욕망은 작가인 비드메의 글쓰기로 전이된다.

내게 문제는 세 번째 덩이다. 마지막에 배치되어 언뜻 작가 욘 포세가 주장하는 핵심 본질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덩이는 소설 속 작가 비드메가 우연히 보게 된, 헤르테르비그의 실제 회화 작품 [보르그외위 섬]에서 받은 ‘신성함’ 같은 자극 때문에 작가는 스스로에게 조금은 거북한, 몸에 맞지 않는 옷인 ‘신’과 ‘종교’를 끌어들인다. 앞의 두 덩이에 대한 메타 서사인 세 번째 덩이에서 마치 우스개 소리처럼 작가 자신의 글쓰기에 신의 가호를 빌고 있지만, 작가의 태도가 너무나 가볍다. 일단 [멜랑콜리아 1]에서 신과 종교의 문제는 접어두자. 혹시 [멜랑콜리아 2]에서 이 의문에 대한 해결책이 있을지 모르겠다. 암튼 현재로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과 그 흔들림에 대해 욘 포세는 서술하고 싶었다고 해두자. 왜냐면 그 자신이 종교를 거북하게 느끼고, 이야기를 강하게 끌고 가는 욕망은 철저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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