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은 상황에서, 책을 정리하다 도무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조차 없는 낯선 책들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느림]의 커버를 젖히자 과거 나의 사수가 96년 3월에 처음으로 같이 일을 하게 되면서 내게 선물했던 책임을 알았다.
[느림]이 좋았던 점은 깊이 있는 관찰에서 나오는 탁월한 묘사인 것 같다. 조그맣게 밤하늘에 걸린 보름달을 ‘똥구멍’에 비유하는 부분이 그렇고, T부인의 유혹의 스킬 속에서 느림이 끌어내는 감정의 증폭이 그러하며, 춤 꾼으로 묘사되는 정치가, 혹은 우리들의 ‘돋보이려 하는 감정’에 대한 심리적 묘사가 매우 탁월하다.
좀 더 서평을 찾아보아야겠지만 인터넷 뉴스, 블로그에서 말하는 현대인의 빠름에 대한 숭배에 대항하는 느림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이것은 읽지 않고 쓴 글이다) [느림]은 몇 겹으로 중첩된 연애 소설이다. 나(밀란쿠)와 베라의 이야기, T부인과 기사의 이야기, 임마쿨라타와 베르크, 벵상과 쥘라의 이야기가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달리하여 벌어지며, 기사와 벵상의 심리를 좇아가는 지극히 심리적인 연애 경험을 들려준다. 단순 연애 경험을 넘어 묘사는 사드의 17세기 문학과의 교접을 시도한다. 그만큼 육체와 성에 대한 탐미적이고, 광적인 느낌을 들려준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계속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왜 책의 제목이 느림일까?라는 부분이다. 소설의 주요 부분은 감정의 내달음을 보여주는 매우 빠른 전개이고, 주인공들의 감정 역시 정적이지 않고, 맥박수가 빨라지는 광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앞부분에 T부인과 기사의 내용이 느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앞부분에서 기억과 망각을 빠름과 느림과의 관계 속에서 말하는 부분에서 느림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역시 전체적인 소설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어쩌면 전체를 고려한다면 도입부에 나오는 ‘엑스터시’가 어떨까 싶다. 하지만 제목은 그 소설을 대표하는 주제이거나 제재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느 정도 소설의 내용과 부분적으로 관계하더라도 그 제목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밀란 쿤데라의 제목에 대한 작법은 매우 상업 지향적이고 전략적이다. [정체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등 제목을 통해 우리는 뭔가 철학적인 사색을 상상하지만, 실제는 연애 소설 속 부분적인 내용이나 소재일 수 있다.
[정체성]
동거부부의 부부싸움의 발단과 시작, 싸움의 전개 과정과 극복을 담은 연애소설. 세계가 밀란 쿤데라에게 주목하는 포인트는 다분히 통속적인 연애 이야기에서 철학적인 의미들을 담아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정체성]은 샹탈과 장-마르크의 정체성을 밝혀가는 과정인 것이다. 샹탈의 내부에 숨어있는 姦婦의 특성을 드러내고, 장-마르크의 주변성을 파헤친다. 요부의 특성과 주변성이 그들의 정체성의 엑기스는 아니지만, 주인공의 중요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로 쿤데라의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느림]과 [정체성]을 읽으며 느낀 것은, 심리의 표현이 매우 극적이며, 적확하다는 것이다. 를르와의 ‘세상을 사는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 번식, 섹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러하고, 섹스를 먹는 것, 배설, 종국엔 개인의 자유와 연결시키는 표현은 기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