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책이 어디서 왔을까?

책을 고를 때 생각하는 것

by 예온 YeOn

여름에 산 책을, 겨울이 다 되어서야 펼쳐보았다. 봄에 산 책을, 여름 동안 읽느라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가을에 산 책은, 또 언제 읽으려나? 읽는 속도보다 새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보니 읽어야 할 책들은 점점 쌓여만 간다. 이렇게 말하면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방이 책들로 둘러싸인 서재를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작은 방 한쪽 벽면을 채울 정도의 책들을 소유하고 있을 뿐인데. 내로라하는 장서가들에게는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수준이다. 사실은 책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책을 처분하고 있다. 그만큼 비워진 공간에 다시 새 책들을 사서 놓아둔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바라볼 때, 빨리 읽어야겠다고 쫓기는 기분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겨울 식량을 마련해 둔 개미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독서를 즐기는 개미의 식량 대부분은 개미가 직접 구한다. 나는 한 마리의 잡식성 개미! 장르와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저서를 구입한다. 어떤 책은 표지가 예뻐서 사고, 어떤 책은 제목이 신경 쓰여서 사고, 어떤 책은 제본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산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라서, 그 좋아하는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의 책이라서, 감명 깊게 본 영화의 원작이라서, 망한 영화의 원작소설이 궁금해서, 단단하게 굳은 내 사고를 살짝 휘젓고 싶어서, 금이 간 내 마음을 땜질해 줄 책 같아서 등 책을 사야 할 이유는 언제나 차고 넘친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취향이라고 할만한 요소가 없다. 내가 봐도 중구난방이지만, 그만큼 다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책을 살 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책들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책방을 더 자주 찾는다. 눈으로 책 제목들을 훑어보다가 유독 한 권의 책에 오래 시선이 머무르면, 내 마음이 뭘 원하는지 깨닫게 된다. 마치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는 독자가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책이 독자를 찾아온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회사도 싫고, 일도 싫고, 사람들도 싫었던, '싫어병' 말기를 앓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당장이라도 사표를 내던지고 싶었던 하루를 보내고 머리를 식힐 겸 퇴근길에 책방에 들렀다. 엉망진창이었던 하루 일과를 곱씹으며 서가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붉은색 표지의 책이 눈길을 끌었다. 일상 속 자극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계발서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부정적인 자극에 부정적인 반응을 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 나는 어떤 상황이 내 삶을 좌지우지하게 방치했구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날부터 나는 마음이 답답하고 어수선할 때마다 책방에 가는 습관이 생겼다. 길을 잃고 헤매는 내 앞에 이정표처럼 나타날 책을 기대하며.


이미 읽은 책들과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내게 온 것들이다. 처음 그 책들을 만났을 때 일렁이던 내 마음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설령 끝내 단 한 번을 펼쳐보지 않았을지라도 그 책을 마주한 짧은 순간에 내 마음에 스친 감정들이 많았다면, 그 책은 충분히 자기 몫을 다한 것이다. 아직 책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책 한 권 사볼 것을 권한다. 책을 사는 것도 독서의 한 과정이니까.





마녀의 서랍_세 번째 칸

고요한 읽기 (이승우 저, 문학동네)


'나는 왜 계속 읽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해 늘 생각한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재와 이 세계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하다.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책 속에는 흔들리는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 줄 문장들이 있다는 걸 믿기 때문에 계속 읽는다.


이승우 산문집 <고요한 읽기>는 우리에게 왜 읽기라는 행위가 필요한지에 대해 작은 실마리를 던져준다. 저자는 다양한 문학 작품 속에서 활자와 활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며 더 깊은 사유 속으로 잠영하는 모습을 독자에게 선보인다. 그리고 미처 그 깊이까지 가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그가 건져낸 생각들을 조용히 펼쳐놓는다. 어떤 이들은 그 생각에 감동하거나 위로를 받고,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나도 저런 근사한 생각들을 책 속에서 건져 올리고 싶다! 생각이 쌓이면 지혜가 되고, 지혜는 삶의 굴곡을 헤쳐나갈 힘이 될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게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다가가는 방법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은 미로처럼 복잡하다.

그럴 때 책은 무척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누군가 남긴 문장들이 작은 힌트가 되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우리는 그 메시지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책 안에서 그저 ‘고요’하게 멈추기만 하면 된다. 아주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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