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권하는 마녀의 탄생

책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

by 예온 YeOn

책을 좋아...아니, 사랑한다. 누군가 취미가 뭔지 물으면, 별 고민 없이 ‘독서’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취미라고 말하기에는 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취미는 반복되는 일상 속 특별한 활동 같은 느낌이 드는데, 나에게 독서는 매일 꼭 해야 하는 양치질처럼 일상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양치질도 취미로 분류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만큼 독서는 삶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 독서의 기능적 측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우리에게 독서가 왜 필요한가? 책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내게 있어 독서는 즐거움, 위안, 충전, 치유 같은 의미로 치환된다. 책은 살면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수면으로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 들 때, 그래서 크게 휘청거릴 때, 가끔 그냥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때, 나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주고 똑바로 설 수 있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남들도 그렇게 느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한테만 재미있는 일은, 나만 하자는 주의’로 혼자 조용히 책을 탐미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독서를 권한 사람은 20년 전에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후배 L이다. 우리는 같은 회사 선후배로 만났다. 당시 L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디자이너였고, 나는 상품개발팀 소속 대리였다. 나이도, 직급도 차이가 나서 가까워질 만한 접점이 없는 관계라고 여겼다. 하지만, L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말수 없고 조용한 저 언니와 반드시 친해지리라’ 다짐하며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나중엔 수다스럽고 헐렁한 언니의 본모습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게 되지만 말이다.)


L은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다가와서 본인도 독서를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구했다. 그런 질문은 난생처음 받아봐서, 우선 어떤 장르에 관심이 있는지 되물었다. 그녀는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최근에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샀다고 했다. 앞부분만 살짝 읽어봤는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덮어두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독서의 즐거움이 ‘내가 품고 있는 문제 대한 힌트’를 발견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L에게 ‘연금술사’는 좋은 소설이니 꾸준히 읽다 보면 분명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말만 했다.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의무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L은 점점 독서의 묘미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책 속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을 얻었다며 무척 기뻐했다. 그 한 권을 시작으로 L은 독서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되었고, 바람대로 나와 절친이 되었다. 나는 '책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라고 믿어왔다. L이 '연금술사'를 만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꾸준히 책을 읽으며, 내면을 다져가는 L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독서의 마법 같은 힘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누군가 고민을 토로하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할 것 같은 책들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독서축제의 이벤트 아이디어를 고민하던 중 ‘책 권하는 마녀’라는 캐릭터가 탄생했다. 축제 현장을 찾은 사람들과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타로점을 보듯이 도서명이 적힌 카드들을 직접 뽑게 하고, 어떤 내용의 책인지 간단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벤트였다. (정말 신기했던 점은, 참여자들이 저마다 자기 상황에 꼭 맞는 카드를 골랐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더 많은 사람이 나처럼 책을 통해 삶의 파고를 넘는 힘을 가지길 바라며, ‘책 권하는 마녀’라는 닉네임으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읽은 책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책 권하는 마녀는 책과 사람들을 연결하고, 독서의 재미를 알리고 싶은 나의 또 다른 자아이다. 마음속 고민이나 걱정을 덜고 마법의 주문 대신 마법 같은 변화를 일으켜 줄 ‘책’을 추천하는 책 권하는 마녀는 그렇게 탄생했다. 앞으로 하나씩 만나게 될 ‘책 권하는 마녀의 독(讀)한 레시피’는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들과 독서를 재미있게 즐기는 팁들로 꾸려 갈 계획이다. 누구나 조금은 가볍게,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를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녀의 서랍_첫번째 칸

키르케 (매들린 밀러 저 / 이봄 출판 )


오랜만에 500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완독 했다. 처음 이 책에 호기심을 가졌던 이유는 ‘키르케’라는 존재가 서양문학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마녀’라는 소개 때문이었다. 마녀, 나는 이 단어가 갖는 복합적인 의미들을 알고 있다. 대부분 어둠의 존재로, 선한 존재들에 위해를 가하는 심술궂고 잔혹한 이미지로 여러 매체들을 통해 표현되기도 했지만, 나는 자신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적절할 때 발휘할 수 있는 지혜롭고 당당한 여성으로 해석되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내가 책을 통해 만난 키르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다단한 마녀였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딸이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님프. 늘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했고, 질투 때문에 또 다른 님프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 그녀. 그 벌로 무인도에서 평생 갇혀 지내게 된 그녀가 자신의 힘을 깨닫고 마녀가 되는 과정은 후회와 고통, 자기혐오로 점철되었지만 키르케는 섬을 찾아온 여러 인물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그런 자신을 날카롭게 직시하면서 점점 자신의 윤곽을 찾아간다.

다른 신들이 비범한 힘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쟁취할 때, 한때 여신이었던 키르케는 인간의 방식으로 시간과 수고를 들여 꽃밭을 가꾸고, 섬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모아 일일이 빻고 조합하면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의 마법을 완성해 나간다. 나는 여기에서 ‘때때로 시험에 들지만, 인내와 끈기로 돌파구를 찾으며 삶을 완성해 나가는 모습이 불완전한 인간의 미덕’이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다. 때로는 실수하고, 후회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고,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그 과정을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여신이자 아이아이에 섬의 마녀 키르케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자신을 변화시킬 마법의 힘이 있다고 조용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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