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작가는 어떻게 저런 대사를 쓸 수 있었을까?
아주 예전, 내가 에세이가 아니라 스토리를 쓰고 싶었던 시절에 난 많이 좌절했다. 좋은 작품을 많이 읽을수록 좌절은 커졌다. 큰 감동이 몰아칠수록, 필사하고 싶은 대사가 많아질수록, 글에서 얻는 깨달음이 커질수록. 그야 글 뒤에는 그것을 쓴 작가가 있을 테니까.
좀 더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쓴 글들을 '덩어리'라 불렀다. 그때 그건 글이 아니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내뱉어낸 무언가였다. 그래서 난 차마 단문이라고도, 일기라고도 이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덩어리라 불렀다. 질척이는 진흙탕에서 건져 올린 뭉텅이. 내 글에는 우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난 우울 밖에 말하지 못하는, 우울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내 머리에는 우울만 있는데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주인공의 지력은 작가의 것을 따라간다는 말처럼, 나는 주인공의 감동을 깨달음을 쓸 수 없었다. 내게 그런 건 없으니까! 저 작가님들은 어떻게 그런 감동과, 교훈과, 깨달음을 글에 담을 수 있을까. 필시 그것은 그 생각이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다는 뜻일 텐데.
1. 작가 안에 있는 것은
만일 위의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부디 가까운 정신과 예약을 추천한다. 내가 우울로 이루어져 있는 줄 알았다는 게 얼마나 틀린 생각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글이 저절로 써진다던가, 주인공이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는 의미를 몰랐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아는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에세이처럼 글을 쓰면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이 글을 쓴다. 거침없이 타자를 친다. 표현을 고민할 때 말고는, 내 말이 주르륵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노트북 앞에 앉으면 한 문단씩 글을 채우고 있다.
희망은 참 어려운 일이고, 깨달음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다. 내가 그걸 놓치지 않는다면,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는 내 글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작가들의 말처럼 내 안에 나도 있는 줄 몰랐던 희망 같은 것이 그 순간에 떠오른다는 것.
이 글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1번을 마무리하고 있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나라는 캐릭터가 이 글을 어떻게든 끝맺을 거란 사실은 안다.
2. 수많은 고민이다.
그건 결국 수많은 고민과 생각. 캐릭터가 스스로 제 답을 찾아나간 것처럼 글이 쓰일 때도 있지만, 그건 결국 나의 많은 고민에서 비롯된 무의식이다. 내 무의식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교훈을 주고 싶어 한다. 그건 결국 나도 힘들기 때문에, 고민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 않을까.
좋은 일만 있다면 깨달음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우울에 대한 절망을 토대로, 난 어찌저찌 우울 외에 다른 것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나의 글이 너무 우울해서 고민이었다. 좋은 작가들은 다들 모든 걸 깨닫고 훌륭한 결말을 지어내는 것 같은데,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다 똑같을 수도 있다.
그저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말을 건네고 싶어서,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해 좋은 답을 내리고 싶어서. 고민을 가지고, 나도 여전히 풀지 못한 고민이지만, 내가 여기까지 고민한 흔적이라도 세상에 내놓아 희망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것을 이야기로 푸는 사람과 자신의 얘기로 푸는 사람과 정보의 글로 푸는 사람들.
난 이제 더이상 나의 글을 덩어리라 부르지 않는다. 과거의 그것들도 그저 고민한 흔적의 일부다. 마구잡이로 뱉어내는 글일지라도 그것은 기록이고, 나의 생각이며, 내가 살아 치열하게 고민한 파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