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나도 10년 전 어떤 사람이 한 말에 상처를 입고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는 그 사람이 한 말을 잊기로 했습니다.
화나는 일이나 실수는 누구한테나 있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왜 지금까지 그렇게 얽매어 있어나 생각해 보니, 그 사람과 잘 지내고 싶은 바람이 나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앞으로는 무리해 가면서까지 좋아하려고 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이제는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집착에서도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을 즐기자. 그 반대는 무의미하니까.”라는 말이 문뜩 떠오르는군요. 그리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실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지요. 우리가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양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주는 책/나카야마 요우코 지음>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사회라면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 사회를 바라는 것은 환상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한다면, 보다 맑은 세상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상처를 받더라도 용서와 이해의 마음을 품는다면, 거기에 천국이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지적과 차별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즉 배려와 친절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이러한 것이 진정한 교양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나 도시에는 아픔과 고통이 항상 따라다닐까요? 저는 그것이 참 의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남보다 키가 컸기에 항상 대장을 맡아서 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대장이 되더군요. 그때는 몰랐던 것이 철들기 전에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늘 배고픔으로 살았었지요.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시절에 내 짝꿍인 철수가 내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도시락을 슬쩍 내주었던 ‘고마움’을 칠순을 넘어서도 잊지 않습니다. 그런 친구가 있었기에 탈선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습니다. 양지와 음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냉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던 시절에는 양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습니다. 종일 양지에 앉아서 멍하니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헌책방에서 내 눈에 맞는 책만을 골라, 배고픔과 추위에서는 시간을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 덕분에 책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참으로 냉정하고 매정한 인간세상이라는 것을 면밀히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의해 인간이 아픔과 고통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받게 됨을 알았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한 친척과 한 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배고픈 조카에게 와서 밥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쉰밥을 먹으라고 주더군요. 밥뚜껑을 열었을 때엔 쉰내가 엄청 코를 찔렀습니다. 그래도 씻고 또 씻어서 간장으로 배를 채웠으니, 그 한(恨)을 품고 말았습니다. 나중에야 그분의 남편이 죽고 슬퍼하는 것을 보고서야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긍휼함이 생길 때에 되더군요.
그 후에 저의 눈이 뜨게 된 것은 진실을 찾아가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과 들을 찾았고,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었습니다. 선과 악, 거짓과 위선, 비방과 험담 등이 어디서 올까? 사람은 누구나 진실함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월감과 열등감이 교차하는 모습에서 그 근본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교만(驕慢)’이란 뿌리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픔과 고통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뿌리에서 남녀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 노래할 뿐이지요. 그 뿌리에서 지식과 재력과 권력을 소유하면, 그것은 칼을 들고 있는 망나니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은 항상 누군가를 지적(指摘)하거나 차별(差別)함으로써 자존심(自尊心)을 확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위적 혼란에 빠져 괴로워합니다. 조선 오백 년의 양반들이 그러했습니다. 명나라에 속박된 환경 속에서 천민을 멸시와 천대함으로써 자존감을 느끼고, 위로했던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말이 있지요. 이것은 우리의 속담이 아닙니다. 일본이 조선을 비하(卑下)하여 만든 속어(俗語)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어서 액면 그런 줄 알고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당연한 듯 받아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자기비하(自己卑下)하는 의식은 정상적인 사고(思考)를 하지 못하게 하며,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이끌어갑니다. 그런 의식은 인간을 비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남을 멸시하고 천대하며, 또는 지적하고 차별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야만이 자신이 남보다 교양이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남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고도 미안한 마음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런 인간은 진실을 외면한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화자찬(自畵自讚)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세상을 우리는 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비참한 인간은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불평불만을 토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비굴(卑屈)함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가장 싫어하는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인간을 창조한 분이십니다. 반면 어떤 인간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인간을 존중하는 사람, 지적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사람은 배려와 친절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진정한 교양(敎養)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이 말한 선한 사마리아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