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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서로 존중하는 것

[독서와 생각]

by trustwons

58. 서로 존중하는 것


“부부 사이에 편하게 말하지 않고 왜 어렵게 얘기하지?”

칠성이 부부가 대답대신 서로를 보며 방긋 웃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를 존중하고 그것을 예의로 표현해야 한단다. 부부나 친한 친구 간에 사이가 나빠지는 것도 대부분 이처럼 간단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지.”

영도의 질문에 할아버지께서 대신 대답을 주셨다.

“맞아요! 사실 우리 부부도 신혼 초에는 참 많이 싸웠어요. 애들 아빠가 저를 하인 부리듯이 넥타이 줘. 밥 가져와. 이럴 때면 기분이 무척 상했죠. 그렇다고 일일이 뭐라 하기도 뭣해서 속으로만 꿍하고 지냈어요.”

“그러다 건수가 생기면 폭발하곤 했지. 난 별일도 아닌데 왜 그리 화를 내는지 몰라 덩달아 화내며 싸우기 일쑤였고......”

칠성이의 설명을 듣고 난 영도는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내도 불만을 터뜨릴 때마다 이런 얘기를 했었다.

‘사람 무시하는 말 좀 하지 마라.’, ‘왜 내 의견을 묻지 않고 결정해서 통보하는 식이냐.’ 등등 영도는 아내의 말이 그저 화가 나서 하는 얘기로만 생각했다. 의견이 충돌하니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허허 사람들이 사랑을 쉽게 얘기한다만,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마음속으로부터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거란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를 낮추는 언행을 하면 상대는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지.”

<겸손/ 김희수 지음/ 엘도라도>



「서로 존중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너무나 간결하고 분명한 대답인 것 같다.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수없이 강조하고 있지만, 성경을 읽었다는 사람들, 또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이들은 얼마나 그 사실을 발견하거나, 알게 되거나, 깨달았을까?

나 역시 그렇지 못하였다. 어릴 적부터 보고 자라온 환경에서는 ‘전통’이니, ‘유교’이니, ‘가문’이니, ‘교양’이니.......

이런 거창한 언어에는 너무나 이해하기도 전에 길들여져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명절날만 되면 가족이나, 친척이나, 어르신? 조상? 전례 등등에 강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는 도대체 ‘나’의 존재는 무엇인지 인지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감히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었었다.

결국은 사회적, 친척이나 가정에서 쏟아부어주는 관습들로 익숙해져 갈 뿐이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모르나, 학교에서 살짝 보여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교육은 바람을 쐬는 기분 정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미 오래 산 인간이나, 지금 살고 있는 인간이나, 앞으로 살 인간들은 무지렁이로써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가며,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인격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존중과 존경이 다른지 같은지 조차도 의식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젖어버린 생활들이다.

훗날에 해외를 여행하면서, 조금씩 눈이 뜨여지게 되었다. 서로 다름에서 그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유럽과 미국의 다른 점에서 더욱 의식할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을 이어온 유럽의 전통성, 그들은 매우 중요시하는, 하물며 도시와 건물과 의상까지도 전통을 중요시하는 유럽인의 특징과 그리 오랜 역사가 되지 못한 미국의 문화성, 그들은 매우 실리적인 것에 눈치가 빠르고, 자위(自衛)적이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아시아인(동양인)들에게는 역시 된장 맛 같은 진득한, 불투명한 언행, 오래된 음흉한 전통성, 고무줄처럼 끈질긴 생활의식, 보이지 않는 강한 민족성, 이러한 고무한 인간성에 서양인들은 많이 놀라워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조차도 다양하게 인지하고, 관습화 되어가면서 인간의 가치는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또는 이러한 인식과 인지에 따라 인류역사는 수많은 곡예를 하였으며, 오늘날에는 거대한 의식영역을 주는 기술문명에 의해 더 과감하게 인간들은 이념과 사상으로 문명의 정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거창한 썰을 풀어내는 이유는, 인간의 활동영역, 지식영역이 넓어지면서 인간들은 인간의 본질에서 매우 멀어지면서 매우 복잡한 의식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되다 보니, 어떤 대화나, 어떤 생각조차도 순수하지 못하고, 어떤 것에 종속되어 있거나, 있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뭣 때문일까? 그것은 인간의 내적 불안이 더 깊고 넓게 내재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사회, 도시사회일수록 인간의 불안도 증가하게 된다. 그래서 한때 이런 말이 있었다. 선진국일수록 자살이 늘어난다고 말이다. 이제는 문명화가 심화될수록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서로 존중하는 것을 알며,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수많은 사례들로써 이러면 안 되지, 그래야 하겠지, 하면서 언론에 의해서 공감을 가지게 되어 조금이나마 인간존중에 다가가려고 한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존중, 인격에 대한 근원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진리’를 추구하고, 찾으려고 하는 본능이랄까? 그런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남녀노소를 떠나서 존중되어야 하며, 그 존중이란 개인의 자유와 의지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한 창조자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관섭하지 아니한다. 그것이 인간을 존중하는 첫째 조건인 것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인간을 얼마든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 지대로 살아간 인생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되는 제도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종교처럼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서나,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종교들은 인간의 본질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격식(格式)을 가지도록 하는 제도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사랑한다 하여도 애수(哀愁)가 생겨나고, 서로 존중한다고 해도 상처(傷處)를 입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랑에도, 존중에도 조절해서 받아들이거나, 포기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된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이 말이다. 악한 인간이 제일 먼저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것이다. 즉 인간존중을 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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