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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r 23. 2024

72. 논리와 합리의 창조원리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72. 논리와 합리의 창조원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7)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잠언 16:23)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9)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베드로후서 3:18)

~~~~~~~~~~~~~~~  Bible  ~~~~~~~~~~~~~~~~~


  ‘사람이 산다.’함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떠오르는 것은 산다함에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다양한 상태로 생명을 지닌 것들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은 저절로 사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물며 미생물이거나 곰팡이 같은 기식 해 사는 것조차도 아무 짓(일)도 하지 않고 절로 살아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산다 함에 대한 많은 생각이나 의식을 만들어내는 생물은 오로지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인간 외에 생물들은 이미 주어진, 또는 정해진 생물학적인 구조와 생태계에 따라 각자의 생존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을 제외한 다른 생물들은 태어날 때에 주어진 삶의 원리 또는 생존원리에 따라 살아간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생각하거나 의식하는 어떤 기능도 소유하지 않은 채로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 생물들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부여받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물들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란 것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생물에서 눈물을 흘린다든지, 애처롭게 슬피 운다는 듯이 인간이 시적 표현을 하였지만, 그것은  이성적 현상이 아니라 본능적, 생물학적 현상에 의할 뿐이라는 것으로 이해하여할 것이다. 만일에 1%라도 이성적 영향을 보이는 생물이 있다면, 이는 진화론적 이론에 의해 생각한다면, 멀지 않아 그 생물은 지능이 발달할 것이며 유일한 이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러한 일은 일어난 적은 없을 뿐이지, 인간의 공상적인, 상상으로 인간을 도전하는 생물이나 로봇을 연출해 보이므로 허망한 생각에 빠지게 하고 있을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성적 활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현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존재와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논리적 이성과 합리적 이성 활동을 생각할 수가 있겠다. 

  논리적 사고,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철학적 지식용어로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바로 논리적 사고와 합리성 사고인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활동인 것이다.

  그럼 논리적 사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먼저 언어학적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논리(論理)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글을 씀에서 내용이 이치(理致)에 맞게 이끌어가는 과정이나 원리이며, 철학적으로는 참된 인식을 하기 위한 사고의 과정이나 형식을 뜻한다. 무슨 말인지....... 그러나 성경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인간에게도 창조자의 모습이 있다? 어떤 모습일까? 외형적인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자도 외형에 구속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성품일 것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고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성품? 인간에게 주어진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주신 것이다. 왜 인간에게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을까?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신지를 추구하길 바라셨던 것이다. 아니 이미 타락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탕자 이야기에서 그 힌트를 주셨던 것이다. 동물처럼 관능적이 아닌, 자유의지를 의지하여 돌아오기를 원하신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올바른 논리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도 역시 논리적으로 흠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즉 창조세계에는 결함이나 결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올바른 논리적 사고보다는 왜곡된 논리로 사고, 즉 인본주의 이념과 사상을 만들어내어 어릴 적부터 악한 생각을 하도록 세뇌, 교육함으로써 그릇된 논리로 창조주에 대한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외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표본이 바로 정치인들의 논리방식이다. 그들은 선전선동과 여론조작과 거짓통계로 그릇된 논리사고를 믿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처럼 끝없이 거짓된 비논리의식을 만들어내고 강요한다. 이러한 인간들은 결코 창조주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거역하는 방향으로 갈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올바른 논리적 사고를 하는 생활, 논리적 사고의식을 갖도록 깨어있는 삶이 필요하다. 참다운 지식은 논리적 사고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창조주를 알게 되고, 인간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논리적 사고를 위해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묵상과 독서 등으로 논리적 사고의 훈련과 의식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창조주,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창조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논리적 사고를 하는 이유는 인간의 가치를 알아가는 방법이며, 창조자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다음은 합리성(合理性)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인간의 합리성은 관계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두 사람이 똑같은 논리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똑같은 논리적 사고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창조자가 인간을 창조할 때에나 동물을 창조했을 때나 별 다르지 않다는 결론이 된다. 즉 획일적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란 말이 된다. 그것은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물들도 환경과 경험에 의해서 본능적 행동이 달라질 수가 있다. 하물며 지능이 있다는 인간이 환경과 경험에 지배를 받는다면, 동물과 별 차이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아마도 타락한 인간들은 그런 동물적인 인간을 원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지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사탄의 조종자가 된 자들이 지배하는 인간세상을 만들어서 창조자를 잊게 하거나 망각하게 하려는 악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처럼 악한 마음으로 오는 인간의 합리성은 왜곡된 합리화를 강요한다. 사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이 특정한 인간들의 의해 강요된 역사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특정한 인간이란 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인 것이다. 이런 자들, 즉 통치자들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앞에서 말했듯이 사탄의 조종자들이기 때문이다. 

  비틀린 합리성, 합리화로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을 만들게 하고, 인간의 이성을 파괴하거나 구속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관습과 제도와 전통과 이념들로 제한된 의지를 갖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악한 인간들은 합리성보다는 합리화로 인간관계를 제도화하여 창조자를 외면한 인본주의, 인간중심의 의식을 갖게 만든다. 합리화는 합리성의 본질이 아니다. 제도화된 합리성인 것이다. 예를 들면, 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절차가 신분에 따라 양식이 다르다. 명절날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제도화된 합리성인 것이다. 

  사실 죽은 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것을 인간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죽은 자를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제도화된 합리화로 인간관계를 지배하거나 유지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관계에서의 합리성은 매우 정의로우며, 매우 선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자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것에는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 대표적인 것은, 시널평야에서 영웅 니므롯의 지배하에 인간들이, 민족들이 흩어지지 못하고 한 곳에 모여 바벨탑을 쌓는 모습에서 창조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파괴되어 가고 있음을 보고, 인간들을 흩어지게 하려고 무력이 아닌 자연스럽게 언어혼란으로 자유의지에 따라 흩어지게 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조종자들이, 그들의 권력으로, 영웅 니므롯처럼 인간세계를 지배하려고 온갖 제도적인 합리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인간의 기술문명으로 인해, 첨단기술로 더욱 세밀하게 제도적인 합리화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세부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합리성은 창조자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사고할 때에 이루어지게 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 선하고 정의로운 합리성을 통해서 인간관계를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게 되고, 참다운 합리성을 활용할 때에 인간관계에는 자유와 평화가 유지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인간사회를, 국가를 이끌어갈 때에 인간은 행복할 수가 있었고, 발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의 선물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 활용하는 길은 올바른 논리적 사고와 참다운 합리성을 추구하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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